1872년 1월21일 오스트리아 극작가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81세로 작고했다. 그릴파르처는 소설의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와 카를 이머만, 시의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와 에두아르트 뫼리케, 니콜라우스 레나우 등과 함께 이른바 비더마이어문학을 대표하는 극작가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다시 유럽에 드리운 구체제의 그늘에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슈바벤 지역 일부 문인들은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접고 은거한 채 소시민적 자족감이 배인 글쓰기를 추구했는데, 이런 문학경향을 비더마이어라고 부른다.
루트비히 아이히로트의 풍자시 ‘슈바벤의 학교교사 고틀리프 비더마이어와 그의 친구 호라티우스 트로이헤르츠의 시’(1850)에 나오는 소박하고 비정치적인 인물의 이름에서 연원한 비더마이어문학은 쇼펜하우어와 헤겔 離컥?보수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마음의 평화나 은둔의 행복 따위를 자연 예찬과 교양 추구의 맥락에 배치하며 때로는 낭만적으로, 때로는 익살스럽게 형상화했다. 그릴파르처 외에 희곡 분야에서 비더마이어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배우를 겸했던 페르디난트 라이문트와 요한 네스트로이가 있다.
그릴파르처는 비더마이어의 다른 두 극작가와는 달리 배우가 아니라 공직을 겸했다. 45년간 오스트리아제국 재무부 관료로 일하면서 그는 꾸준히 희곡을 썼고, 때때로 서정시와 단편소설, 문학평론에도 손을 댔다. 운명비극 ‘할머니’(1817)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릴파르처는 예술과 삶의 겉돎을 천착한 연애비극 ‘사포’(1818)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빈객’ ‘아르고나우트원정’ ‘메데아’ 3부작으로 이뤄진 ‘금빛 양모피’(1821)로 문명을 확고히 다졌다. ‘거짓말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1838)가 평단의 혹평을 받은 뒤 연극계와 인연을 끊었지만, 그릴파르처는 그 이후에도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로 공무원 생활의 메마름을 눅였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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