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유아원에 보내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TV는 늘 나와 함께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TV의 리모컨은 내 손을 떠날 줄 모른다. 저녁 늦게 귀가한 남편에게 리모컨을 넘겨주고 나서야 TV와의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유아원에서 처음 ‘TV 안보기 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 우리 가족의 반응은 모두 시큰둥했다. TV의 부정적인 측면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TV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더 많은 긍정적인 요소를 도외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TV 안보기 운동을 실천하면서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TV를 보지 못해 더 늦게 들어오겠다던 남편이 의외로 일찍 귀가해 아이와 함께 놀아주는 게 아닌가. (애 돌보기가)귀찮다는 이유로 "혼자 비디오나 보고 있어"라고 TV 앞으로 밀쳤던 내가 아이와 함께 요리를 하고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부모와 함께 습관적으로 TV에 노출돼 산만하게 시간을 보내던 아이도 엄마 아빠와의 놀이와 독서, 다양한 사물에 관심을 보이며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TV 안보기 운동은 TV 때문에 잃어버렸던 가족과 아이를 발견하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지난해 9월 TV 안보기 운동에 참여했던 숙명유아원 학부모의 고백이다. 숙명여대 서영숙(가정아동복지학부) 교수는 1994년부터 유아원과 교회 등을 대상으로 TV 안보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해마다 9월께 숙명유아원 원생 가족을 중심으로 1주일간 TV를 끄는 대신, 놀이 미술 음악 요리 독서 등 부모와 자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대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TV 안보기 캠페인을 벌인다. 주변 서점과 빵집, 음식점 등도 호응해 ‘TV 안보기 운동’ 배지를 달고 오는 가족에게 10~20%의 할인혜택을 준다.
캠페인에 참여한 어린이와 부모는 매일 TV를 끈 뒤 일어난 일들을 글이나 그림으로 기록하는 등 가정에서의 변화를 점검하고 TV 시청을 대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실천하고 있다. 서 교수는 "이 운동에 참여한 현직 PD도 TV의 악영향을 절감해 리모컨을 아파트 밖으로 내던져버리는 등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소개했다. 아이들도 "엄마 아빠가 자신과 이렇게 많이 놀아준 적은 처음"이라며 좋아한다.
18일에는 기독교 가톨릭 등 종교단체와 학부모를 중심으로 ‘TV 안보기 시민모임(No TV Network)’이 결성됐다. 이 단체는 매년 어린이주간인 5월 첫째 주와 독서의 달인 9월에 한 주 등 1년에 두 차례 ‘TV 끄기 주간’을 설정, 범국민 캠페인을 벌일 계획이다. 대표를 맡은 숙명여대 서 교수는 "성장기에 TV를 ː?살아온 요즘 대학생들은 글쓰기나 토론 능력이 너무 떨어진다. 아이들이 TV에 빠져 지내는 것은 부모들의 무절제한 TV 시청에도 원인이 있다"며 TV에 빼앗긴 가족의 행복을 되찾기 위해 범국민운동에 나서자고 제안했다.
가톨릭 서울대교구 소속 화곡본동 본당(주임 차원석 신부) 신자인 이성복(52)씨 집 안방 TV에는 ‘대화가 TV 시청보다 소중하지 않을까요?’라는 글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 무심코 TV를 켜려다가도 ‘텔레비전이 엄마, 아빠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어요’라는 권유문을 보면 멈칫해진다고 한다. 실제로 TV를 보는 시간이 크게 줄었고 드라마는 아예 보지 않기로 아내와 약속했다.
이 성당은 지난해 9월 5,000장 이상의 ‘TV 안보기 계몽판’을 제작, 신자들에게 나눠줬다. TV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프로그램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것도 문제지만, 가족에 대한 관심과 대화를 앗아가는 주범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TV를 보지 말자’라는 내용이 포함된 ‘어린이 십계명’도 조만간 만들어 나눠줄 계획이다. 성당 사무장 고구영(54)씨는 "TV는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가족간의 대화를 막아 가정을 파괴하는 주범"이라며 "앞으로도 TV 안보기 캠페인을 꾸준히 전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국청소년연맹 산하 ‘좋은 TV 만들기’(www.tveye.or.kr)는 청소년들이 TV를 절제해서 보고 비판적 시각을 키울 수 있도록 하루만이라도 TV를 보지 말고 다른 문화를 즐겨보자는 ‘미디어 프리데이’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방학 중에는 청소년 대상의 ‘방송 모니터 학교’를 열어 무분별한 방송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서 선별적 수용능력을 갖추도록 돕고, ‘방송 모니터 동아리’를 구성해 좋은 프로그램을 고르는 안목도 길러준다.
TV 안보기 운동이 가장 활발한 곳은 미국이다. TV 중독의 폐해가 언론과 시민단체를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교회 학교 등 단위조직으로 펼쳐지던 TV 안보기 운동이 이미 전국적인 시민운동으로 자리잡았다. 비영리단체 ‘TV 끄기 네트워크(TV-Turnoff Network)’는 1995년부터 TV 끄기 주간을 정해 이 기간에는 절대 TV를 보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1주일간 TV를 안보는 대신 가족과 친구끼리 산책 여행 자전거타기 독서를 즐기는 등 TV에 매몰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즐기자는 것이다. 지난해 4월 19~25일 ‘TV를 끄면 삶이 살아난다(Turn Off TV ? Turn On Life!)’라는 주제로 열린 10회 행사에는 전국의 학교와 도서관, 의사단체, 교회 등 1만9,000여개 단체에서 약 760만명이 참가했다.
TV 끄기 네트워크 제니퍼 커즈 대변인은 "미국 어린이들은 연간 1,000시간(하루 평균 3시간) 이상을 TV 앞에서 보내며 다중 채널, 비디오 게임, DVD 영화까지 감안하면 TV 앞에 묶여 있는 시간은 훨씬 늘어난다. TV를 보며 빈둥거리는 미국의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면 심장병과 당뇨 등 각종 중병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캠페인의 취지를 설명했다.
독일은 어린이 프로그램에 기업의 스폰서 참여를 허용하지 않고 있고, 스웨덴은 어린이 방송시간대에 패스트푸드 광고를 법으로 금지했다. 호주는 취학 후 어린이 프로그램을 C(Children), 취학 전 어린이 프로를 P(Pre-school)로 나눠 방송사마다 고정시간대를 정해 방송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P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시간에는 광고까지 전면 금지된다.
■ TV 끄기를 위한 1주일 전략 - 미국 ‘TV 끄기 네트워크’
▲1단계실행하라
집안의 모든 달력에 ‘TV 끄기 주간’임을 표시하고 가족에게도 주지시켜라. 가족에게 당신이 1주일간 TV를 보지 않기로 결정했음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라.
▲2단계조직적인 팀 만들기
조직적인 팀을 만들면 실천하는 게 더 쉽고 재미있다. 자기 직장이나 학교 등 공동체에서 비공식적인 TV 끄기 조직을 만들어라. 교장, 도서관 사서, 종교지도자 등의 지지와 참여를 요청하라. 숫자가 많을수록 힘이 된다.
▲3단계참가자 분류하고 격려하기
학교 도서관 종교기관 책방 학원 병원 환경단체 박물관 등은 TV 안보기 운동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이다. 특히 초등학교는 TV 안보기 운동을 위한 중추 조직이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지나친 TV 시청이 초래하는 악영향을 보아왔고, 그에 따른 주의력 및 독서능력 저하 등의 폐해를 잘 알고 있다. 도서관이나 교회 성당 등을 방문해 TV 끄기 워크숍이나 독서 행사, 설교 등을 요청하라. 지역 사회의 서점 체육관 커피숍 문구점 갤러리 등에 전화해 TV 안보기 참여자들을 위한 특별 활동이나 할인행사를 제안하라.
▲4단계미디어와 협력하기
미디어는 TV 안보기 운동의 중요한 후원 기관이다. 미디어와 접촉해 ‘여가시간을 풍요롭게 이용하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바보상자인 TV를 끄자’라는 강한 메시지를 보내라. 지역 신문의 편집자와 라디오 방송국에 연락해 캠페인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인터뷰하고 TV 끄기 주간을 소개하는 기사를 싣도록 독려하라. 각 신문사의 독자 투고란에 편지를 보내라.
▲5단계대체 활동
TV 안보기 운동을 시작하면 "TV를 안보는 대신 뭘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이 쏟아진다. 대답은 "어떤 일이라도 좋다"이다. 한번 TV를 끄면 가능성은 무한하다. 1주일의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특별한 활동을 계획할 필요는 없다. 아이들에게 지루함은 종종 창의성이 샘솟는 샘물이다. 하지만 잠재적 실망을 피하려면 가족들이 오랜 기간 함께 즐길 수 있는 대체활동을 개발하는 게 중요하다.
▲6단계축하하라, 그리고 계속하라
TV 끄기 주간을 즐겨라. 그리고 캠페인이 끝났을 때 당신과 가족, 학교, 공동체 모두 축하하라. 참가자들을 위해 파티를 열거나 상을 주어라. 그리고 잊지 말라. 당신이 만약 TV에서 자유로워 졌다면, TV 안보기 운동을 계속하라. TV 없이도 삶을 풍요롭고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수많은 활동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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