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움직임을 알아내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다. 그 중에서도 기원전 2세기 경에 살았던 그리스 학자 히파르쿠스는 본격적으로 별을 연구했던 인류 최초의 천문학자로 꼽힌다. 그는 기초적인 장비만을 이용해 1년의 길이를 거의 정확하게 계산했고 지구의 자전이 지축을 흔들리게 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가 기원전 129년에 출간한 별자리 목록에는 별들의 위치와 함께 밝기를 측정하는 척도가 나와 있다. 그가 개발한 척도는 아직도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쓰이고 있다.
안타깝게도 히파르쿠스가 저술한 원본이 남아있지 않아 학자들은 후세 학자들이 그의 연구를 분석한 해설서에 의존해야 했다. 미국 루이지아나대 물리학과 브래들리 쉐이퍼 교수는 히파르쿠스의 흔적을 찾아 세계 곳곳을 끈질기게 뒤진 결과,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는 한 대리석상에서 그의 것으로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11일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미국천문학회 회의에서 공개됐다.
쉐이퍼 교수가 연구를 위해 선택한 자료는 사람들이 즐겨 찾던 나폴리 국립 고고학박물관에 위치한 유명한 대리석상 ‘파르네제의 아틀라스’였다. 2.1c 높이의 이 대리석상은 제우스의 명령으로 지구를 어깨에 짊어지게 된 ‘거인 신’ 아틀라스를 그린 것으로, 그가 들고 있는 지구본에는 백조자리 양자리 등을 포함한 41개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이 대리석상은 서기 150년경 원본인 그리스 작품을 본떠 로마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로마의 ‘파르네제 궁’에 있었기 때문에 ‘파르네제의 아틀라스’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여기 새겨진 별자리는 현재 인류가 간직한 가장 오래된 천문 지도다.
쉐이퍼 교수는 "사람들은 그리스 시대의 기록들을 단순한 신화나 소설로 생각할 뿐 과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우연히 접한 대리석상에 매우 과학적인 힌트들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대리석상의 지구본은 적도를 상징하는 두꺼운 가로선을 갖고 있었으며, 남극과 북극을 상징하는 두 개의 원과 경도를 상징하는 세로선도 눈에 띄었다고 한다.
쉐이퍼 교수는 이 별자리가 작성된 기준 년도를 찾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별자리는 2만6,000년을 주기로 변한다. 지구의 지축이 조금씩 움직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지구본에 새겨진 별자리가 히파르쿠스가 살던 기원전 126년 경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면, 이는 히파르쿠스의 별자리 연구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직접적인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쉐이퍼 교수는 우선 지구본에 새겨진 선들과 별자리 위치의 관계를 측정하는 작업에 나섰다. 예를 들어 양(羊)자리 뿔의 끝에 위치하는 ‘감마 아리’라는 별은 날짜 변경선으로 보이는 두꺼운 선과 붙어 있었다. 그는 70개의 별을 골라 사진을 찍어 분석한 결과, 이 별자리가 기원전 125년 전후 것임을 알아냈다. 이 때문에 한 때 별자리의 출처로 예상됐던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서기 2세기)나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기원전 3세기)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게 됐다.
쉐이퍼 교수는 "그동안 천문학자 사이에서 천문학의 원조가 히파르쿠스냐 프톨레마이오스냐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며 "가장 오래됐으면서도 놀랍도록 정확한 증거를 찾아낸 이상 히파르쿠스 쪽에 무게가 실리게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히파르쿠스가 제작했던 것으로 보이는 별자리 지도의 모형을 만들고 있다.
쉐이퍼 교수는 "2,10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더 뛰어난 천문학자인지를 알아내는 연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일부 주장도 이해한다"면서 "그러나 어느 분야에서나 마찬가지로 천문학에서도 역사와 흐름을 아는 것은 중요하며 이번 연구 결과는 지금까지 잊혀졌던 천문학의 시초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샌디에이고=김신영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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