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로 자라난 젊은 영국 여인이 있다. 그녀의 몸에는 꽤 알아주는 화가 아버지와 프랑스 오페라 가수였던 어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다. 어렸을 적 배운 프랑스어 실력이 만만치 않고,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로 역경에 굴하지 않는 당당함과 품위 또한 지녔다. 뭇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좋아할 만한 매력들로 똘똘 뭉친 이 여인 베키 샤프(리즈 위더스푼)의 단 한가지 단점은 잘 나가는 귀족이 아니라는 점.
남의 집 더부살이를 지내며 바닥 걸레질과 설거지로 일찌감치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파악했을 그녀는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상류사회 진출을 꿈꾼다. 인도를 오가며 장사를 하는 친구 아멜리아의 오빠가 첫 목표물. 그는 금방이라도 결혼식을 올릴 것처럼 덤비지만, 결국 귀족이 아닌 여자와 결혼하면 신분이 강등된다는 친구의 말에 물러선다.
그러나 언제든지 운명을 개척할 준비가 되어있는 베키에게는 그것이 큰 상처가 될 수 없는 일. 고모의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기로 되어있는 로든 대위가 그녀의 사정권 안에 들어온다. 어렵지 않게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는 두 사람. 베키는 귀족신분을 얻었지만, 문제는 조카의 낭만적 사랑을 용서치 않는 고모다. 결국 남편은 부모와 고모에게 돈 한푼도 받지 못하고, 베키는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간다.
21일 개봉하는 ‘베니티 페어'는 영국 소설가 윌리엄 메이크피스 테커레이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1915년 처음 영화로 만들어진 이후 7번째다. 주인공 베키는 사랑스럽지만 주변사람들을 파멸로 몰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이다. 그러나 미라 네어 감독은 평면적 잣대로 그녀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을 좋고 나쁘다는 편리하면서도 위험한 구분으로 나누려 하지 않는다. 상류사회를 넘보면서도 자기방식대로 사랑을 하는 베키와 주변사람들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많은 등장인물들에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 인생의 파노라마를 빚어내기도 하고,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유머 넘치는 장면들과 감독의 성숙한 시선은 137분의 상영시간을 지루하지 않도록 한다. 스크린 위에 꼼꼼히 복원한 19세기 런던의 길거리와 귀족의 생활상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15세관람가.라제기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