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우리 산업계의 화두를 꼽으라면 단연 ‘디지털 융합’이다. 디지털 융합은 통신과 방송, 인터넷과 문화콘텐츠 등 별개 산업이 첨단 정보통신 기술을 매개로 만나 새로운 분야를 창출하는 현상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분야다. 전파를 송신하는 방식에 따라 ‘위성’과 ‘지상파’ 방식으로 나뉘는데, 미디어 산업에 큰 변화를 몰고올 첨단 디지털 이동방송이다.
산업 전망도 우수해서 2010년께는 서비스와 단말기를 통틀어 2조7,000억원의 시장을 형성하고, 15조원대의 생산유발 효과를 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DMB서비스 일정 불투명 = 그러나 DMB 관련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기업들은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통신업계와 방송업계간 대립으로 인해 본격적인 서비스 일정조차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위성DMB 컨소시엄에 참여 중인 중견기업 C사의 최고경영자는 "정부의 ‘IT839’ 정책을 믿고 거액을 투자했는데, 언제 수익이 날지도 모르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위성DMB의 경우 지난해 3월 일본과 공동으로 방송위성을 띄웠지만 10개월간의 공전 끝에 이달 10일에야 겨우 시험 서비스를 시작했다. 위성DMB 사업을 추진해온 TU미디어 관계자는 "일본과의 주파수 협상과 위성 공동소유, 방송 센터 및 콘텐츠 확보 등의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됐지만, 지상파DMB 진영과의 이해 갈등과 정부 일각의 무관심으로 예정보다 반년 이상 뒤지고 있다"고 탄식했다.
위성DMB 서비스 일정의 지체는 KBS, MBC 등 지상파DMB 사업 예정자들의 일정 연기 요구가 먹혀든 결과다. 방송사들은 위성DMB의 상업성 문제를 거론하며 위성DMB 서비스가 조기 실시될 경우 지상파DMB 시장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 뒤에는 통신·방송 융합의 조류 속에 방송업계의 기득권이 정보통신업계의 기술과 자본에 잠식 당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깔려있었다.
결국 방송위원회가 방송업계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성DMB 사업자 추천과 지상파 콘텐츠 재전송 허가를 계속 유보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 DMB 서비스 국가’라는 타이틀을 일본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 와중에 DMB 장비 업체들은 부도와 합병의 고통을 겪었고, TU미디어도 위성 및 방송시설을 놀리는 바람에 매달 16억원의 ‘헛돈’을 쓰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지상파DMB가 유료화 논쟁에 휘말리면서 DMB 정식 서비스는 빨라야 6월 이후에나 시작될 전망이다.
◆ 상생보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 = 이 같은 업계간 이기주의로 인한 폐해는 디지털 융합 현장 곳곳에서 목격된다.
인터넷 음악 산업도 대표적인 경우다. 과거 테이프, LP 등을 사야만 즐길 수 있었던 음악콘텐츠가 디지털화 하면서 인터넷이라는 매개를 통해 압축된 형태의 파일 정보로 유통이 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기존 음반 시장은 크게 위축됐고, 인터넷 음악 유통 확대로 음반 산업과 인터넷 산업은 급속한 융합단계를 거치고 있다. 이 같은 융합 과정에서 양 산업은 상생의 합의점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음악 저작권자의 거센 피해 보상 요구와 투쟁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내 최대 인터넷 음악 사이트인 벅스의 박성훈 사장은 "음반업계의 이기주의적인 태도가 음악 산업을 퇴보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벅스는 주문형(on-demand) 인터넷 음악 방송이라는 독특한 서비스 방식으로 1,600만명의 회원을 확보하는 대성공을 거뒀지만 무료 서비스를 해왔던 탓에 음반업계와의 저작권 침해 분쟁에 휘말려 현재는 고사 위기에 처해있다. 박 사장은 "원만한 해결을 위해 대기업(CJ그룹)에 회사를 매각, 100억원의 현금과 수백억원의 미래 가치를 지닌 회사 지분까지 제공하는 고육책을 내놓았지만 음반 업계는 끝까지 200억원의 현금 보상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음반 업계는 MP3 서비스를 시작한 이동통신 업계와도 충돌했다. 음반 업계는 지난해초 MP3 휴대폰이 출시돼 인기를 끌자 이통 업계에 보상금 지불을 통한 문제 해결을 요구했고,협상 타결까지는 10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줄잡아 300만명에 이르는 MP3폰 사용자들은 MP3 파일 재생 허용 기간을 놓고 오락가락한 협상 때문에 혼란을 겪어야 했다.
한 이통 업체 관계자는 "음반 업계의 권리 주장은 당연하다"며 "그러나 산업적 관점에서 본다면, 내일 아침에 생겨날 황금알을 미리 얻으려고 거위의 배를 여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 업계 장단에 춤추는 정부 = 전문가들은 산업간 첨예한 갈등을 극복하고 디지털 융합 산업 발전을 이루려면 정부가 중재자로 나서 대국적인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중립적이어야 할 정부의 담당 부처들마저 전형적인 부처 이기주의에 빠져 업계의 이해관계에 맞장구를 치는 등 ‘정책 분열’에 휩싸여 있는게 사실이다.
정보통신부가 DMB 산업을 일찌감치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지정하고 조기 서비스 실현을 위한 제도적 지원에 나선 반면, 방송 산업을 규제하는 방송위원회는 방송사들의 논리를 답습하며 위성DMB 사업 허가 일정을 지연시켜왔다. 두 기관은 뒤늦게 고위급 실무자로 구성된 정책협의회를 구성했지만, 최근에는 또 다른 디지털 융합 사업인 인터넷TV(IP TV) 사업을 놓고 밥그릇 싸움을 벌이고 있다.
또 문화관광부는 이통 업계와 음반 업계간 MP3폰 분쟁과 벅스와 음반 업계간 협상 과정에서 음반 업계의 입장과 논리에 매몰된 모습을 보여 정통부와 IT업계의 반발을 샀다. IT업계의 한 최고경영자는 "창작물의 전송권을 보장한 새 저작권법 제정 과정에서도 문화관광부는 규제 대상이 되는 IT업계의 애로점에 대해 별다른 고려를 해주지 않았다"며 "도대체 총리실과 청와대의 부처간 정책 조정 기능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선문대학교 이 연 교수는 "한국은 법제도가 디지털 기술 혁명을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를 겪고 있다"며 "이로 인해 기술 선점의 호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후발 국가의 추격을 허용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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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DMB갈등 어떻게 극복했나/4년전부터 법 정비 업계충돌 최소화
우리보다 앞서 위성DMB 상용화에 성공한 일본은 디지털 융합 과정에서의 이해 대립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일본도 심각한 업계간 갈등에 시달렸지만 정부와 법제도의 적절한 보호로 조용하고도 합리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다.
일본 위성DMB 사업자인 모바일방송주식회사(MBCo)의 미조구치 사장은 "위성DMB 사업자와 방송 업계간 대립으로 인한 난점은 일본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MBCo는 현재 지상파 방송 콘텐츠를 위성DMB 단말기를 통해 재전송하고 있는데, 지역 방송사들의 불만이 만만치 않다. 특히 일본에서는 공영방송인 NHK를 제외한 모든 방송사가 지역 방송으로 허가돼 있어 위성DMB의 지상파 재송신은 법으로 보장된 지역 방송사의 방송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일본 정부는 그러나 위성DMB와 같은 디지털융합 산업이 일본의 IT산업과 디지털 콘텐츠 산업을 육성시킬 수 있는 전략적 서비스이며, 궁극적으로는 방송 콘텐츠 시장의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만큼 ‘법제도의 유연한 적용을 통해 최대한 지원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본 총무성의 오가사와라 위성방송과장은 "위성DMB는 이미 전 국토를 대상으로 하는 위성TV 방송과 성격이 비슷하므로 전국 방송이 가능하다는 해석을 내렸다"고 말했다.
일본 방송 업계 역시 이 같은 정부 입장을 수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MBCo는 지상파 콘텐츠를 직접 재전송하는 대신 NHK 등 방송국에서 구입한 프로그램을 편성해 내보는 간접 방식으로 지상파 채널을 운영하고 있어 충돌의 여지를 최소화 했다.
놀랍게도 일본은 이미 2001년부터 이 같은 디지털융합 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법제도를 고치는 작업을 해왔다. 일본 정부는 2001년 ‘전기통신 역무이용 방송법’을 제정, 통신사업자도 통신설비를 이용해 방송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또 2003년 7월에는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해 통신설비를 보유하지 않은 사업자도 통신·방송업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 인터넷과 방송, 통신의 구분이 무너져가는 디지털융합의 추세에 대비해 왔다.
일본은 또 총무성이 방송과 통신을 동시에 관할토록 해 통신·방송 융합 업무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한편 특정 전문가 집단의 판단이 아닌 방송법의 세부 규정을 통해 방송 사업을 규제토록 해 정책의 객관성 확보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도쿄=정철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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