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쯔양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17일 오전 사망했다. 대중 앞에 나타난 그의 마지막 모습은 1989년 5월 19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전개하던 학생들을 방문하여 눈물을 글썽이며 동정과 지지를 표현하고 해산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는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으나 당내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던 그로서는 사태를 전환시킬 힘은 없었다. 중국 당국은 5월 20일 베이징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6월 3일 밤부터 인민해방군을 톈안먼 광장에 진입시켜 많은 사상자를 낳은 끝에 시위를 종결시켰다. 자오쯔양은 6월 24일 총서기직에서 축출됐다. 이후 자오쯔양의 동향에 관한 소식은 종종 외신을 통해 보도됐으나, 중국 내 언론의 공식보도는 이번 사망 소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6년이 지났지만 톈안먼 사태는 중국에서 여전히 민감한 사안 중 하나 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톈안먼 사태는 1987년 초 학생들과 자유주의적 지식인에 대해 동정적 태도를 취하였다는 이유로 보수파 원로들에 의해 총서기직에서 축출된 후야오방이 1989년 4월 갑자기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후야오방이 부당한 평가와 대우를 받았다고 판단했고, 곧 이어 톈안먼 광장에서 그를 애도하고 그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정당한 평가를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그런데 보수파의 영향을 받은 인민일보가 이를 ‘반혁명 동란’이라고 규정하면서 학생들의 시위는 중국 당국과의 정면충돌로 비화했다. 이들의 충돌은 타협점을 찾지 못했고, 사태의 발전을 용인할 경우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불안감을 가졌던 중국공산당 내의 보수파들은 무력을 동원하여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톈안먼 사태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결과는 중국에서 정치개혁을 후퇴시킨 것이다.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1992년 초 86세의 덩사오핑이 ‘남순강화’(南順講話·남부에서 행한 연설) 정책을 통해 적극적인 시장화 개혁과 대외개방을 촉구했고, 중국공산당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채택하면서 톈안먼 사태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톈안먼 사태의 진압을 최종 결정한 덩샤오핑 스스로가 톈안먼 사태를 재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톈안먼 사태 이후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중국 지도부의 정치 개혁에 대한 경계심은 더욱 커졌다. 많은 지식인들도 발전을 위해서는 안정이 필요하며 정치개혁은 뒤로 미루어질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든 현재에는 중국도 날로 심화되는 소득격차와 부패, 인권보장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치개혁을 계속 외면하는 것은 어려워지고 있다. 이에 톈안먼 사태와 자오쯔양에 대한 재평가는 중국 정치개혁의 진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자오쯔양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중국의 과거만이 아니라 앞날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남주 성공회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