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드러난 사실
17일 공개된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에는 그 동안 실효성과 비중을 놓고 논란을 빚던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협상이 사실 상 타결됐으며, 우리 정부가 북한측 피해보상까지 요구한 사실 등이 새로 드러났다. 또 정부가 개인 청구권 문제를 꺼내지 않으면서 일본 자금으로 경제개발에 나서려 했던 정황과 독도 관련 일본의 새로운 발언도 밝혀졌다.
◆‘김-오히라 메모’로 협상 끝났다 = 1962년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이 당시 일본 오히라 외상을 만나 ‘무상 3억불, 차관 2억불, 상업차관 1억불 이상 제공’ 등에 합의한 ‘김-오히라 메모’로 협상 타결이 이뤄졌다. 외무부는 1963년 3월 작성한 ‘한일회담 일반 청구권문제’ 보고서에서 "한일간 의견차로 인해 62년 8월부터 진행된 예비 교섭에서는 준 정치적 방식으로 다루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또 65년 3월 보고서에서는 "김-오히라 양해로 청구권 문제가 완전 타결됐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애초 논란이 됐던 개인별 청구권은 총액과 명목 위주로 논의됐고, 민감한 사항은 두 사람이 넘겨 받아 정치적 합의를 이룬 것이 문서로 확인됐다. 그 동안 정부는 김종필씨의 입장을 감안한 탓인지 이 메모를 평가 절하해온 측면이 있다.
또 외무 장관 비서관은 한일협정 가 조인을 며칠 앞둔 65년 3월29일 공보관에게 "청구권문제 금액이 변경(액수 증가)되는 경우 각사(언론사) 데스크와 접촉해 ‘김-오히라 메모 사실상 백지화’라는 표제로 대대적인 PR를 하시기 바람"이라는 암호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이는 이 메모가 한일협정 반대 시위대의 집중 표적이 된 데 대해 정부가 상당한 부담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다.
◆ 북한측 청구권도 우리가 = 정부는 당시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임을 내세워 북한 몫까지 협상대상에 포함시키려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외무부는 64년 3월 주일대사에게 보낸 훈령에서 "헌법상 주권은 이북 지역까지 미치는 것이므로 청구권 문제 해결에는 이북지역도 포함된다고 주장했으나, 일본측은 이북지역에는 교섭의 상대자가 될 당국이 없다는 입장"이라며 "입장이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협정에 명문으로 규정하지 않고 양국 정부가 각각 자국민에게 설명하도록 하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 경제개발 자금확보가 먼저 = 정부는 협상을 진행하면서 일본의 청구권 자금 도입을 전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보완계획 B안’ 등을 경제기획원 주도로 작성했고, 64년 2월에는 청구권자금의 산업별 투입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반면 개인 배상에 사용할 금액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 독도를 폭파? = 62년 9월 열린 제6차 한일회담 4차 예비회의에서는 일본측의 ‘독도 폭파’ 망언이 있었다는 사실도 새삼 확인됐다. 당시 한국측 최영택 참사관이 "독도 문제를 왜 꺼내려고 하느냐"고 따지자 일본측 대표단인 이세키 국장은 "사실상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도쿄의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 北·日수교 교섭엔 영향 없을 듯
이번 외교문서 공개가 향후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 교섭에 미칠 영향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02년 9월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평양선언은 한일 수교와 마찬가지로 청구권 포기·경제협력 방식을 명시하고 있다.
북일 수교 협상의 기본방침을 담은 이 선언은 "국가와 국민이 모두 재산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기본 원칙에 따라 구체적 협의를 한다"며 "국교정상화 이후 쌍방이 합의한 적절한 시간이 지난 뒤에 무상자금 협력, 저금리 장기차관 제공,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 경제협력을 실시한다"고 돼 있다.
북일간에 쟁점은 차라리 한일 수교 때와 비교해 경제협력의 규모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이다.
북한측은 한일 수교 때의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를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고 그 뒤 일본의 대북 적대정책과 한국 유·무형 지원 등을 이유로 80억~100억달러를 비공식적으로 주장해왔다.
일본은 액수에 언급한 바가 없는데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미일이 북한의 군사비 전용을 막기 위해 규모를 최소화하고 현금이 아니라 인프라 건설 등 현물지원으로 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게다가 북일 수교는 북한 핵·미사일, 일본인 납치 문제가 완전 해결되고 한미의 최종 양해를 얻은 뒤에야 가능하기 때문에 아직 멀고 험한 길이 남아있다.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 JP ‘깊은 침묵’/이동원 前외무도 외부접촉 피해
한일협정 체결의 두 주역인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이동원 전 외무장관은 17일 한일협정 문서 공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사자는 물론 측근들도 이날 "새삼스럽게 할 얘기가 없다"고 말을 삼갔다.
김 전 총재는 재일교포 지지자들 초청으로 신년하례회 참석차 지난 7일 일본으로 출국해 직접 연락이 닿지 않았다. 측근인 유운영 전 자민련 대변인은 이날 "김 전 총재는 일본에 있을 뿐더러 한국에 있더라도 한일협정 문제에 특별히 코멘트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김 전 총재는 평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아왔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김 전 총재는 한일협정 문서 공개가 임박한 지난해 이후 여러 차례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으나 "할 말이 없다"며 거절했다.
김 전총재는 1962년 11월 12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자격으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당시 일본 외상과 회담을 갖고 한일협정의 분수령이 된 ‘김·오히라 메모’를 교환한 당사자다. 김 전 총재는 현역 정치인 시절 "나라의 경제부흥을 위해 어떤 일도 하겠다는 각오로 협상에 임했다"고 회고하곤 했다.
한편 1965년 6월 특명전권대표 자격으로 한일협정을 조인한 이 전 외무장관 역시 접촉을 피했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 日 "한국 내정문제일 뿐" 언론들 "비판·소송 한국정부에 쏟아질 듯"
일본 정부와 언론은 한국 정부의 한일협정 문서 공개가 일본의 전후 보상이나 한일 외교관계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한국의 내정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이미 지난해 12월 한일 정상회담 직전 한국특파원들과의 회견에서 "한국의 내정문제로 일본 정부나 내가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정리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이미 한국측 설명을 통해 공개 대상이 한국 협상단과 한국 정부간의 청구권 관련 전문 보고 내용으로서 일본측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란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 문제를 이것저것 꺼내면 서로 유쾌하지 않은 생각이 되살아 날 수도 있다"는 고이즈미 총리의 말처럼 외교문서 공개, 일제 협력자 진상규명 등 일련의 과거사 규명 움직임을 우려하는 시각은 남아있다. 호소다 히로유키(細田博之) 관방장관은 17일 "우리로서도 (한국의 문서 공개의) 내용과 경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교도(共同)통신은 "강제징용 등 피해자가 일본 정부에게 개인보상을 요구하는 길은 막히게 됐으며 향후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요미우리(讀賣)신문도 "식민지 지배에 따른 개인보상 의무를 한국 정부가 진다는 것이 확인돼 앞으로 비판과 소송이 한국 정부에 향해질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또 "한국 정부가 불리를 각오하고 공개한 것은 과거 역사 청산에 적극적이 노무현 정권의 노선을 따른 것"이라면서 "박정희 정권의 빚을 떠맡아 지지를 얻으려는 계산"이라고 지적했다.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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