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 따라 금융감독원장이 채권금융기관에 채권 행사를 유예하도록 요청한 것은 법적 효력이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판결이어서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서울고법 민사19부(김수형 부장판사)는 17일 SK네트웍스(옛 SK글로벌)가 "금감원장의 채권 행사 유예 요청에도 불구하고 채권을 행사한 것은 부당하다"며 동양종금을 상대로 낸 191억여원의 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채권금융기관들이 채권행사 유예 요청에 구속된다면 가장 채권이 많은 주채권은행의 일방 의사에 의해 채권 행사 여부가 좌우될 수밖에 없다"며 "구촉법 상 채권 행사 유예 요청에 반해 채권 행사를 했더라도 아무런 제재 조치를 규정하지 않은 점 등을 ㉭훌?때 금감원장의 요청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SK네트웍스는 2003년 3월 주채권은행인 하나은행이 차입금 상환이 어렵다고 판단해 채권금융기관협의회 소집을 통보하자 자구책 마련을 위해 동양종금에 수익증권 환매를 요구했다. 동양종금은 그러나 수익증권 환매에 응하는 대신 SK네트웍스가 발행한 액면가 191억여원의 무보증 회사채를 수익증권 환매 대금과 상계했다. 이에 SK네트웍스는 "금감원장의 채권 행사 유예 요청에도 불구하고 예대 상계 방식으로 채권을 행사한 것은 위법"이라며 상계 처리한 191억여원을 되돌려 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현행 구촉법은 금감원장이 주채권은행의 요청에 따라 부실 징후 기업에 대해 채권 행사 유예 요청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부실 징후 기업이 발견됐을 때 채권금융기관이 회의를 소집해 채권 행사 유예를 결의하기까지 통상 7일 정도 시간이 걸리는데, 이 기간의 혼란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원은 금감원장이 채권 행사 유예를 ‘요청’할 수 있을 뿐, ‘강제’할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원활한 기업구조조정이나 금융 시스템의 안정보다 채권금융기관의 자율적인 재산권 행사 쪽에 손을 들어 준 셈이다. 물론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려 봐야 겠지만, 그간 구촉법이 관치 금융을 일부 조장해왔다는 측면에서 진일보한 판결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당장 무임 승차하려는 금융기관이 속출하는 등 적잖은 혼란이 예상된다. 부실 징후 기업에 대해 주채권은행이 채권금융기관협의회를 소집할 경우 일부 금융기관은 자신의 채권을 먼저 회수하겠다고 덤벼들고, 결국 나머지 금융기관만 손해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법원이 법의 취지를 외면한 채 지나치게 자구에 연연해 판결을 내린 느낌이 적지 않다"며 "만약 대법원에서도 동일한 판단이 내려진다면 법을 개정하는 등 서둘러 보완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김지성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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