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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와카 시인 故 손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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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와카 시인 故 손호연

입력
2005.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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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가요’는 왕의 치세를 찬미하는 일본 국가다. 작은 돌이 이끼 무성한 큰 바위가 될 때까지, 임금의 치세가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짧은 노래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고 노래하는 우리 애국가와는 생성과 소멸의 미학이 정반대지만, 영원을 희구하는 점에서는 같다.

‘기미가요’는 백제 출신 학자 기노쓰라유키가 편찬한 ‘고금와카(和歌)집’에 실려 있는 시다. 905년 간행된 이 책에는 백제 박사 왕인이 지은 일본 최초의 와카 ‘매화송’도 수록되어 있다. 백제인이 일본 왕족과 귀족의 주축을 이뤘던 점, 그들이 와카를 즐겨 노래했던 점 등으로 미뤄 와카와 ‘기미가요’의 창조자는 백제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와카는 31자에 느낌과 생각을 담는 정형시다. 17자로 이루어진 하이쿠(俳句)와 함께 일본인들이 아껴온 문학 장르다. 일본인이 소중히 여기는 ‘만요슈(萬葉集)’에는 백제 도래인의 자취가 엿보이는 와카도 많이 있으나, 정작 우리는 와카의 원형인 단가(短歌) 형식을 역사의 어느 구비에서 잃어버렸다.

유일한 한국인 와카 시인 손호연씨도 2년 전 타계했다. 와카에만 매달렸던 그의 문학적 생애는 많은 사연과 한일 문화사의 깊은 굴곡으로 얼룩져 있다. 혼란스러운가 하면 안타깝고 기구하다. 진명여고를 나온 그는 동경제국여자대학에 유학하는 동안, 와카문학의 최고 권위자인 나카니시 스스무에게 사사했다. 어리고 여린 감수성 위에 내려진 문학적 세례가 그를 평생 일본어에 의지해 와카만 노래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 전통시라고 믿고 있는 와카를 계속 지을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하는 갈등이 거의 매일 반복되는 가운데 50여 년이 흘렀다. 그는 2,000여 편의 와카를 지었고 일본의 유명출판사 고단샤에서 6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그 중 다섯 권이 ‘무궁화’라는 이름이다. ‘제1무궁화’ ‘제2무궁화’…. 일본어 와카로 쓰여졌지만 역사 속 개인의 일상 정서를 읊을 뿐, 친일문학은 아니다. 그의 딸 이승신씨가 우리 글로 옮긴 와카들을 본다.

'겨레가 말없이 순종하는/ 오욕의 날을 눈여겨보던/ 나라꽃 무궁화>, '연이어 망명객은 돌아오는데/ 오지 않는 한 사람/ 아버지, 그리워라>, '6·25 동란으로/ 혼자된 어머니/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젊었네>

시집을 내고 원로문인의 꾸중을 들었다. "나라가 독립되고 긴 세월이 흘렀소. 우리에게는 자랑할 만한 한글과 시조가 있지 않소? 생각을 바꾸시오." 큰 상처를 받았으나, 당연해 보이는 충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첫사랑처럼 각인된 와카에의 감수성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썼다. 문학적 재능이 축복이자 굴레가 되었다. 그는 언젠가는 와카의 근원이 우리 것임을 인정 받고, 우리가 다시 단가를 갈고 닦을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역사에서 한일 간의 단절과 뒤틀림은 그의 문학적 삶마저 왜곡시켜 놓았으나, 만년에 이르러 한일 문화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2년 후 일본 정부에서도 표창을 받았다. 일본에는 와카의 대가인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네 개나 서 있다.

올해는 을사 국치 100주년,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다. 또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는 ‘한일 우정의 해’다. ‘무슨 해’라고 별 신통력이 있을까마는, 일본에서는 지금 양국민의 해묵은 정서적 거부감을 치유해 줄 뜨거운 전류가 이상기류처럼 흐르고 있다. ‘겨울연가’가 불러일으킨 한류와 ‘욘사마(배용준) 현상’이다.

손씨의 외로운 작업도 뒤늦게 평가를 받고 있다. 한류뿐 아니라 동북아에서 중류·일류도 공평하고 평화롭게 흐를 날이 가까워 오는가. 시조와 다른 매력을 지닌 와카의 탄생지가 한반도임을 밝히는 일이 학자들의 숙제로 남았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겐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는>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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