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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흥 前대법원장 사망/지병악화 비관 자살 택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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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흥 前대법원장 사망/지병악화 비관 자살 택한듯

입력
2005.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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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자살한 유태흥 전 대법원장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경복고와 일본 간사이(關西)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48년 조선변호사 시험(2회)에 합격,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홍성지원 판사, 서울형사지법원장, 서울고등법원장, 대법원 판사(1976~81년) 등을 거쳐 대법원장(81~86년)을 지냈다. 이후 국정자문위원, 안중근 의사 사업추진위원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다 89년부터 광화문법무법인 변호사로 일해 왔다.

유씨가 대법원장으로 재임했던 5공 시절은 사법부가 정권에 예속돼 있다는 평가를 받던 시절. 그도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가 이끌었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85년 김대중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등이 비상계엄 기간인 80년 5월1일 계엄사령관 허가 없이 집회를 가졌다는 혐의로 기소된 계엄법 위반 사건에서 변호인측의 상고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또 85년 시국사건에서 유화적인 판결을 내린 박시환 인천지법 판사(현 변호사)를 지방으로 전보시켰다가 법원 안팎의 반발을 샀고, 급기야 당시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에 의해 탄핵소추를 당했다. 탄핵표결이 부결되면서 임기를 모두 마칠 수 있었으나 법조 경력에 오점을 남겼다.

유씨는 평판사 시절인 71년 판사들이 변호사에게 출장여비 등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되면서 촉발된 1차 사법파동 당시 영장심사를 맡아 영장을 기각,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유씨는 10여년 전 부인과 사별한 뒤 회사에 다니는 미혼인 두 아들과 함께 종로구 행촌동 자택에서 살고 있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유씨는 허리에 지병이 있어 수년간 통원치료를 받았으며 최근 병세가 악화, 물리치료까지 받아왔다. 그는 "통증이 심해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 이날 오후 3시께 "병원에 들른 뒤 공원에서 놀다 오겠다"고 말하고 혼자 집을 나섰다. 경찰은 일단 고령의 유씨가 신병을 비관해 투신 자살한 것으로 보고 조사 중이다.

유씨가 투신한 마포대교 주변에서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주차된 차량도 없어 경찰은 유씨가 혼자 투신 지점까지 걸어가 강으로 뛰어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소방서구조대에 의해 구조됐을 당시 양복바지 차림에 구두를 신고 있었으며 목도리를 한 평소 복장 그대로의 모습이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유씨는 곧바로 응급 심폐소생술을 받은 후 인근 여의도성모병원으로 옮겨졌다. 유씨는 병원에서 의식은 없었지만 생명은 유지한 상태였으나 이날 밤 10시35분께 제2차 심장마비를 일으키면서 끝내 사망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 19일 오전 10시. 장지 충남 홍성군 선영. (02)3410-6902

김영화기자 yaaho@hk.co.kr

최영윤기자 daln6p@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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