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장년의 고교 동창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돈을 내려 하자 3, 4명의 친구들이 "어이, 무슨 돈이 있다고 허세 부리나"라며 말렸다. 서로 돈을 내겠다는 몸싸움 속에 대기업 간부로 있는 다른 사람이 음식값을 냈다. 친구들에게 허세를 부린 것으로 치부된 이는 초선 국회의원이었다.
이 국회의원이 유난히 가난했을까. 아니다. 요즘 의원들 처지가 대부분 그렇다.
지난 연말 또 다른 전국구 초선의원은 후원금 통장을 보고 낙담을 했다. 통장에 입금된 후원금이 650만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후원금을 보내달라는 홍보물 제작에 600만원이 들었으니 겨우 50만원 남은 셈이다. 유머 책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빚진 의원들이 수십 명"이라고 전했다. 농협 믄망痴×【?마이너스 통장을 쓰는 의원들도 적지 않다. 한 해 후원금 한도는 1억5,000만원이지만 이를 채운 의원은 몇 명 안 된다.
한 초선 의원의 고백.
"돈을 안 쓰겠다고 다짐했는데 꼭 써야 할 곳이 생기더라. 지구당이 없어졌고 과거처럼 선전, 청년, 여성, 직능부장 등은 두지 않아도 되지만 연락사무소는 필요했다. 지역구 일을 챙기는 사람과 전화 받는 여직원은 필요했다. 사무실 보증금에 월세, 전기료, 그리고 실비에 가까운 월급을 주는 데도 한 달에 500만원 든다. 의정보고서 3만장을 찍는데 2,000만원, 자료집 만드는 데도 1,000만원, 전문가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하는 데 몇 백만원이 들었다. 후원금이 1억1,000만원으로 비교적 많이 들어온 편이나 이리 저리 쓴 돈을 셈해보니 적자였다."
그렇다고 다른 돈을 받을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다. 숱한 정치인들이 불법 자금으로 구속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청탁을 대가로 음습한 거액을 받는 정치인도 분명히 있을 터이지만 전체적으로 정치가 많이 깨끗해졌다.
따라서 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을 만든 주역들, 이를 철저히 적용한 선거관리위원회에 찬사를 보낼 만 한다.
그러나 "부자나 변호사 아니면 정치하기 힘들다"는 아우성이 나올 정도라면, 후원회행사 허용 등 다소 숨통을 터주는 법 개정도 생각해볼 법 하다. 정치인의 빚이 계속 늘어난다면 결국 검은 돈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장관이나 국회의원에게 충분한 돈을 주되 비리에 연루되면 엄벌에 처하는 청렴국가 싱가포르의 지혜가 필요한 때인 듯 싶다. 물론 허구한 날 싸움만 하는 정치인에게 세비도 아깝다는 국민들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치부 부장대우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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