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헤르만 헤세의 모든 작품을 읽겠노라고 청계천변의 헌책방을 모조리 뒤지며 케케묵은 먼지 속에서 헤세의 책을 끄집어 들었을 때의 기쁨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철 지난 문학 잡지를 찾아 다니며 결국 수십 권에 해당되는 과월호 잡지 전체를 하나하나 사서 모았을 때의 기쁨은 또 얼마나 형용할 수 없던 것이었나.
책갈피에는 누렇게 잎이 바랜 낙엽이 끼워 있기도 하였다. 또 어떤 책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에 정확히 밑줄이 그어져 있기도 하였다. 대체 내가 공감하는 구절에 밑줄을 친 그는 누구일까. 나의 상상력은 그를 한 명의 아리따운 처녀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기도 했다. 낡은 페이지를 열었을 때, 코에 싸하게 풍기는 냄새, 한 권의 책을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질량감과 헌책이 가져다 주는 몽상, 헌책방에서 한 권의 책을 구입한다는 것은 그 모든 구체적인 느낌과 만나는 일이기도 하였다.
인터넷에서 책을 구입한 지 3년째다.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고, 안방에서 할인혜택까지 받을 수 있는 데다 일간지 서평과 독자 리뷰를 읽을 수 있으니 인터넷서점은 여러모로 이득이다. 그러나 책에 대한 애착이 줄어든 탓일까. 인터넷에서 책을 구입한 후로 버리는 책의 양이 많아졌다.
의사는 환자의 환부를 절개했을 때 풍기는 악취로도 병의 악화 정도를 판별할 수 있다고 한다. 첨단의 통신장비가 동원되는 사이버진료도 여러 장점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의사는 직접 환자의 몸을 살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책도 그런 게 아닐까. 내 발로 책을 찾아가 책장을 열고, 책의 냄새를 맡고 책의 질량감을 느낄 때, 비로소 온몸으로 책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손가락 클릭만으로 책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온몸을 동원하는 그런 만남!
김보일 배문고 교사·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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