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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죽비소리 - 유장한 名文에 담긴 옛 선비의 진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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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죽비소리 - 유장한 名文에 담긴 옛 선비의 진면목

입력
2005.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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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허균이 유배지에서 썼다는 편지의 이 구절은 근년의 정치 칼럼 적당한 곳에 넣어둔대도 어색하지 않을 성 싶다. ‘풀이 꺾인다’식의 세습왕조 백성의 풀기 없는 표현이 찜찜하다면, 현대 정체(政體)의 주인이라는 백성의 대변자다운 기백을 실어두면 될 일. 정민 한양대 교수는 그 구절을 "그 생각만 하면 입맛이 떨어지고, 한마디로 김이 팍 샙니다"라고 옮겼다.

우리 한문학을 소개하는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바 있는 필자가 옛 글을 읽다가 만난 문장들을 추려 ‘죽비소리’라는 책을 냈다. 전후좌우 맥락을 툭툭 쳐낸 격언투가 아니라 원 문장의 유장한 호흡 그대로 옮겨놓은 글들이어서, 유사한 형식의 다른 글에서 경험하게 되는 감정의 거스러미를 면할 수 있다.

조선후기 유학자 유광익이 ‘풍암집화’에 당시 영남 사람들의 이원익과 유성룡에 대한 인물평 한 토막을 실었다.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필자는 이 문장을 설명하며 병법의 한 대목을 소개하고 있다. "병법에서는 불가기(不可欺), 즉 속일 수 없는 지장과 불인기(不忍欺), 곧 차마 못 속이는 덕장, 불감기(不敢欺), 즉 감히 못 속이는 맹장으로 지휘관을 나눈다." 그는 "너무 똘똘해서 속여먹을래야 속일 수 없었다던 유성룡보다 이원익에게 자꾸 정이 간다"고 덧붙였다.

한양에 있던 추사가 전남 해남의 초의 선사에게 편지로 거듭 차(茶)를 청했지만 종내 반응이 없었던가 보다. 뒤늦게 초의가 답장과 차를 보냈던 바, 그에 대한 추사의 답장은 이렇다. "차의 향기에 감촉되어 문득 눈이 열림을 깨닫겠구려. 편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살펴보지도 않았다네."(김정희 ‘여초의’)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이식의 ‘택당집’에서는 퇴계 이황의 일화 한 토막을 옮겨놓았다. "단양 군수로 있다가 떠나갔을 때의 일이다. 아전이 관사를 수리하려고 들어가 방을 보니, 도배한 종이가 맑고도 깨끗하여 새 것 같았다. 요만큼의 얼룩도 묻은 것이 없었다. 아전과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 필자는 "그의 성리학에 대한 도저한 학설보다 이런 작은 기록들을 통해 퇴계의 진면목을 본다"고 했다.

120개의 가려 뽑은 문장을 회심(會心) 경책(警責) 등 열 두 개의 주제단락으로 나누어 실은 것은 농사의 월령(月令)처럼 인생을 극진하게 이뤄가자는 뜻이라고 한다. 각각의 글은 한문 원문과 직역, 필자의 평설로 이뤄졌는데, 개개의 글마다 널찍한 여백을 거느리고 있다. 그 여백은 소개한 이의 평설에 얽매이지 말고 각자의 느낌을 담으라고 마련한 것이리라.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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