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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 왜 나는 시인인가 - 김춘수, 그는 왜 ‘순수의 꽃’을 피워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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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 왜 나는 시인인가 - 김춘수, 그는 왜 ‘순수의 꽃’을 피워야 했나

입력
2005.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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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타계한 김춘수 시인의 문학과 삶의 지향을 다양한 층위에서 느끼게 하는 산문집이 나왔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명지대 교수) 씨가 고인이 남긴 다수의 글에서 가려 뽑은 산문을 한 데 묶은 ‘왜 나는 시인인가’다. 책에 실린 글들은 그의 사유, 그 흐름과 지향의 기록이며, 그 속도와 밀도의 결정(結晶)이다. 책은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는 유소년 시절의 경험과 고향 통영에 얽힌 추억, 일본 유학시절의 수감생활, 시인이 되기까지의 크고 작은 인연 등을 소개하는 자전적 글들이 모여 있다. 그의 20대, 스스로 습작기라고 했던 그 시기의 끝에 쓴 ‘꽃을 위한 서시’에 대한 단상이다. "나는 비로소 아류의 티를 벗고 내 나름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그것이 릴케류의 관념시다… 비로소 나는 애착?가는 시를 생산할 수 있었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이 시를 누구에게 보였더니 "비로소 자네의 시가 나왔다"고 치하하면서 "다만 끝의 한 행은 너무도 릴케의 수사를 닮고 있어 불안하다"고 덧붙이더란다. 그는 "시인이 된다는 것이 참 어렵기도 하구나 하는 것이 그때의 내 감회였다"고 글을 맺었다.

2부에서는 신의 아들 ‘주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고통과 좌절에도 끝내 체념을 넘어서는 성찰의 준범(準範)으로서의 ‘인간 예수’를 정교한 상상과 시적 사유로 되살려놓고 있다. 예수가 살던 시절의 갈릴리 호숫가 마을들은 가난했고 돌림병이 창궐했다. "예수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 한 젊은이의 두려움과 외로움 곁에 가만히 언제까지나 있어 주었을 뿐이다. 예수는 자기가 그처럼이나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시인은 예수가 "가장 무력한 자로서 땅벌레처럼 짓밟히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즉 ‘사람의 실존’을 스스로 보였고, 예수 이후의 기나긴 역사의 시간은 "그가 흘린 피의 값을 깨달아가는… 숨바꼭질의 시간"이라고 했다. 부지런한 천성을 타고나 궂은 일을 도맡는 나사로의 딸 마르다가 천진하고 아름답지만 게으른 동생 마리아를 나무라달라고 청하자 예수는 "마르다여, 마리아에게는 마리아의 몫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시인은 이를 "매미에게는 매미의 몫이 있고, 개미에게는 개미의 몫이 있다는 어떤 숙명론을 말한 것은 아니다. 가치의 다양함을 말한 것이다"고 하더니 그 ‘가치의 다양성’이 잊혀질 때 예술이 수단이 되고, 그 수단에 부합하지 않는 예술은 퇴폐로 낙인 찍힌다고 했다. 남진우씨는 "김춘수의 예수에 대한 에세이들은 우리 산문 문학이 도달한 한 수준을 보여주는 뜻 깊은 성과물"이라며 "순수를 갈망했고 남다른 순결벽의 소유자인 이 시인이 왜 예수라는 인물에 집착했는가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연구 주제"라고 적었다.

3부는 시인의 독서 편력과 영화 시작 후기 등 시인의 인품과 개성이 잘 드러나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을 단 글의 첫머리는 그의 자화상으로 시작한다. ‘안색은 핼쑥한 편이다. 이마는 넓고 반반하다… 이 얼굴은 별로 표정이 없다… 탈바가지를 하나 얻어 쓰고 있는 그런 느낌인데… 어떻게 하면 이 탈바가지를 벗겨볼 수가 있을까’로 이어지고 있다.

4부의 어떤 글들은 정치·시사 논객으로서의 시인의 면모와 인간성에 대한 도저한 순결주의를 엿볼 수 있다. ‘러셀의 우스꽝스런 양심’에서는 T.S 엘리엇의 전기 일부를 소개하는데, 평화주의자 러셀이 그의 제자였던 엘리엇의 부인과 간통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한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일 수도 있는 그 같은 파렴치행위가 그의 사상과 어떻게 조화할 수 있는지, 또 제1차 세계대전 전쟁국채를 사서는 그 이자배당으로 엘리엇을 돕는 행위가 그의 평화주의와 모순되는 것 아닌지 꼬장꼬장하게 따진다. ‘무엇이 진보인가’에서는 이념 논쟁의 지평에 더러 동원되는 ‘진보’라는 용어의 상대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지적하며, 기술과 문명의 진보가 아닌 인간의 근본문제 사회의 근본문제에서의 진보를 부정한다. "인간의 심성이라는 이 요지부동의 존재를 때로는 의식하면서 진보를 말해야 한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자기들을 정의의 입장에 서 있다고들 한다. 어림도 없는 소리."

시인은 ‘왜 나는 시인인가’라는, 다분히 공격적이고 격렬한 논조의 글에서 다양한 측면에서 그가 추구하는 참다운 시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나는 언어를 버리고 싶고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절실히 희구하기 때문에 그나마 나는 시인이다. …언어로부터의 해방은 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절대자유의 경지가 된다. 자유여 왜 너는 나에게로 오지 않는가. 그 탄식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준다." 엮은이의 말처럼 ‘이제 문학사적 인물이 된’ 시인의 이 글은 아무래도 ‘당신은 왜 시인이 못 되는가’라고 꾸짖고 있는 듯하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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