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근 성균관대 교수는 세상이야기를 철학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고, 철학을 세상 이야기 속으로 녹아 들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학자다. 2년 전 그는 ‘동양철학의 유혹’이라는 책을 써 모든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동양철학의 중요한 개념을 어머니가 세상이야기 들려주듯 자상하게 설명하고, 부족하다 싶으면 아름다운 시구나 흔히 보는 그림 풍경 사건 등을 예로 들어 쉽게 풀이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동중서:중화주의의 개막’이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사람다움의 발견’이라는 책을 또 냈다고 하니 이 역시 놀랄 일이다.
이 책은 유학의 본질과 문제의식을 ‘사람다움’으로 보고 유학사상사를 시대의 변화에 따른 ‘사람다움의 발견’이라는 시각에서 연구하고 있다. 신정근은 유가(儒家)라는 이름은 유학을 비판적이거나 경멸적 시각으로 보던 묵자와 한비자가 붙인 이름이라 한다. 그는 법가(法家)와 명가(名家) 도가(道家)처럼 유가에게 정당한 이름을 붙인다면 당연히 인가(仁家)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소한 듯하지만 얼마나 참신한 주장인가. 그가 인(仁)을 이해하는 관점은 지금까지의 연구방법과는 판이하다. 그는 ‘다양한 문헌의 인을 획일적이거나 단선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비판하고 부정한다. 지금까지 인은 시대를 초월해 주로 ‘사랑’ ‘사람다움’ 등의 단어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인이 실제로 사용된 구체적이면서 고유한 역사적 문맥에 주목해 독특한 의미를 규명하려고 한다.
이 책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좌전(春秋左傳)’ ‘논어(論語)’ ‘맹자(孟子)’에 등장하는 인의 의미를 실례를 들어가며 역사적 문맥 가운데서 그 의미를 추적했다. 그렇다고 유가의 사상에만 시선을 한정하지는 않고 당시의 사회변화와 사상의 흐름, 갈등과 영향관계에 있는 여러 사상에 눈길을 주었다.
책의 논점은 인 문자가 최초로 언제 그리고 어떤 문헌에 등장하는가, 인은 처음에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시경’ ‘서경’ 같은 초기 문헌 이후 인은 중국철학사에서 단일한 의미로만 사용되었는가, 선진 시대의 문헌, ‘논어’ ‘맹자’는 한(漢)대 이후의 모든 철학적 물음과 개념을 이미 가지고 있을까 등이다.
이 책은 머리말에서 지금까지 인 연구사를 압축해 설명하고, 탐구의 밑그림을 제시해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제1부에서는 ‘시경’ ‘서경’ ‘춘추좌전’을 텍스트로 춘추시대 인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시경’에는 인이 두 번 나오는데 이 때는 ‘남자답다’는 의미이며, ‘서경’(고문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금문만을 대상으로 함)에서는 인이 한번 나오는데 이 때는 ‘재주가 많다’는 의미라고 한다. ‘춘추좌전’에는 인이 31곳에 모두 39회 등장하는데 이 때는 대체로 ‘규합’이라는 뜻이다. 이어 제2부에서는 ‘논어’에 쓰인 인의 의미를 ‘화합’으로 압축했으며, 제3부에서는 ‘맹자’의 인을 ‘개통(開通)’으로 정리했다.
저자는 인의 의미를 시대별로 달리 정의해 각 시대마다 살아있는 사람다움의 의미를 역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를 테면 ‘개통’이라는 의미는 텍스트를 넘어 시대적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것이며, 외물 중심의 담론이 갖는 한계와 관련한 추론이다. ‘남자답다’와 ‘재주가 많다’ ‘규합’ 등은 춘추시대의 사회변동과 당대 사람들의 대응양식을 배경으로 해서 나온 것이다. ‘화합’이라는 의미는 책임 귀속적 행위자가 등장한 것과 관련한 설명이다. 사람다움을 의미하는 인이 시대마다 의미를 달리한 것을 확인하면서 저자는 각각의 시대 속에서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결인 인문정신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
결국 그는 유학을 단순한 봉건주의 이데올로기로 배척할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추앙할 사상도 아닌 사람다움의 발견을 향한 여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준다. 사람됨을 발견하는 여정이 어느 한 시대에 완성되고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인류와 더불어 계속될 과제라면 인문학의 탐구 또한 영원한 숙제와도 같은 것이다. 유학에는 사람다움이라는 개념 외에도 많은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 개념들의 구체적인 의미를 더 깊게 이해하고, 개념과 개념간의 상호관계를 자세히 드러낸다면 유학의 본질과 문제의식에 대한 이해의 폭도 더 넓어지리라고 생각한다.
14, 15세기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사상을 새롭게 이해하면서 서양의 르네상스가 시작됐고, 그 연장선에서 현대의 과학문명이 세워졌다. 동아시아 고대의 유학사상이 21세기의 한국 땅에서 새롭게 이해되어 동아시아 문명의 르네상스를 이루고, 나아가 과학문명과 동아시아 인문사상이 새롭게 만나는, 인문정신에 기초한 과학문명의 남상(濫觴)을 꿈꾸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이광호 연세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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