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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학 기자가 체험한 TV를 끄면 인생이 보인다] (3) TV를 끄고 행복을 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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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학 기자가 체험한 TV를 끄면 인생이 보인다] (3) TV를 끄고 행복을 켠 사람들

입력
2005.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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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인 우리 집 둘째(아들)는 어렸을 때부터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몹시 산만한 아이였다. 유치원 때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쳐 아내와 선생님이 고생을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교실에서 말도 없이 사라져 담임 선생님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친구들에게 충동적으로 반응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퉜다. 아마도 낮은 수준의 주의력 결핍장애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놀랍게도 TV를 끄고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런 증상은 거의 사라졌다. 최근엔 독서퀴즈대회에서 상을 받아올 정도로 집중력도 좋아졌다. 기자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집에 가면 씻는 둥 마는 둥 TV 앞에 누워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잠에 곯아떨어지던 내가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자상한 아빠, 아내와 산책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사랑스러운 남편으로 바뀐 것이다.

운동도 시작했다. 새벽에 아내와 함께 요가를 배우러 다닌다. 건강에도 좋지만, 아내 손을 잡고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새벽길을 걷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신선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그 순간이 내겐 너무도 소중하다.

기자가 지난해 6월부터 1개월 간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는 30가구를 대상으로 펼쳐 본 ‘TV 안보기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자.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면 남편이 오기 전까지 습관처럼 TV를 켰다. TV 안보기 운동을 시작한 뒤부터는 책을 읽거나 성경 공부를 한다든지, 조용히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을 계획하는 시간으로 활용한다. 시간적 정신적으로 여유가 많아지다 보니 이웃이나 친구들과의 교제도 늘었다.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읽는다."(30대 주부)

"평소 즐겨 보던 TV를 안 보려고 하니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TV를 끄니 일찍 자고 운동을 할 수 있어 좋았다. TV 끄기를 계속 해야겠다."(초등학교 4학년)

"저녁 9시 뉴스는 꼭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저녁 10시까지 뉴스를 보고 나면 취미생활을 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보내기엔 어정쩡한 시간이 돼 버린다. 그래서 계속 드라마를 보거나 밀린 집안일을 하다 그냥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TV를 끄면서 아이들과 대화하고 운동하는 시간이 많아졌다."(40대 주부)

TV 안보기 운동에 참여한 뒤 가족에게 나타난 긍정적인 변화에 놀라 TV를 아예 치워버린 경우도 있다. 교육공무원 남모(44)씨는 아내가 맞벌이라 평소 초등 1, 3학년 자녀의 TV 시청을 막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할머니와 공동작전을 펴며 3주 간 꾸준히 TV 끄기를 실천한 결과, 20여일 만에 가족들이 TV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남씨는 4주째 접어들 때 "TV가 옆에 있으면 괜한 호기심에 켤 수도 있으니 아예 창고에 집어넣자"고 제안했다. 아이들은 "TV를 그대로 놔두고 보지만 않으면 될 것 아니냐"며 아쉬워했지만, 막상 TV를 치운 뒤에는 "학교에서 TV 없는 집은 우리 집뿐"이라며 자랑 반 기쁨 반으로 만족해 했다.

주변에 보면 TV 끄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지난해 5월 경기 분당의 한 중학교 게시판에는 이 학교 1학년 상림(13·여)이의 아버지가 ‘TV 없는 집에 사는 상림이가 불쌍하니?’라는 제목의 글을 띄웠다.

"상림이네 집에는 TV가 없단다. 거의 2년이 되어간다. 아저씨가 재활용센터에 전화해 TV를 가져가도록 했단다. TV가 유익함에 비해 해로움이 훨씬 크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애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나, TV를 거실의 가장 중앙에 모셔놓고 마치 숭배하듯이 의존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것은 실은 건강하지 않은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우리들은 TV에 중독돼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의 TV 중독은 일상화된, 그래서 특별한 문제의식이나 반성 없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우상숭배’라는 아저씨의 주장이 혹시 지나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희들이 한번쯤은 바로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바란다."

상림이 아빠 오세훈(44·KFI 대표)씨는 상한 음식이나 인스턴트 음식이 우리 건강을 해치듯이 TV가 쏟아내는 불량 프로그램들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과감히 TV를 없애버렸다. 방송작가인 아내도 흔쾌히 동의했다. 아내는 아이들이 잠든 후 인터넷으로 드라마를 본다. 처음엔 반대하던 아이들도 선생님이 "너희 부모님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구나"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긍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그의 막내 아들은 지난해 학교에서 ‘독서왕’ 상장을 받았다. 책을 많이 읽어 고교생 대상 퀴즈문제도 제법 맞힐 정도로 어휘력이 풍부해졌다.

교육 컨설턴트 김명옥(41·여)씨는 중 2, 초등 5학년인 두 아들의 엄마다. 아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우선 눈이 휘둥그래진다. 거실에 TV도 컴퓨터도 없고, 사방 벽에 책만 빽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1년째 TV 끄기를 실천해 온 김씨의 두 아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짱’으로 통한다. TV 상식이 부족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권의 유머집을 독파해 상황에 맞는 유머로 좌중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과외 한번 받지 않았지만 성적은 항상 전교 1등이다. 어렸을 때부터 5,000권 이상의 책을 읽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정리하는 습관이 몸에 밴 덕이다.

"TV를 끄면 늘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일과 육아에 소홀하던 남편이 집안일에 관심을 갖게 되고 아이들 공부도 도와준다. 아내 역시 남편이나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져 생활이 한결 윤택해진다. 아이들은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성적도 부쩍 향상된다. 부모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만든 TV가 사라지면 자녀는 부모와 책에서 재미를 찾는다." 1994년부터 TV 안보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숙명여대 서영숙(가정아동복지학부) 교수의 말이다.

■ "TV 안보면 왕따" 는 착각/ 신문·책 통해 세상과 소통

"TV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불멸의 이순신’이나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같은 드라마를 보지 않으면 친구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요."(초등학교 6학년)

"습관적으로 TV를 보는 것은 문제지만, 프로그램을 잘 선별해 본다면 TV 시청이 그리 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시사적인 내용은 TV가 다양한 내용을 빠르게 전해주기 때문에 다른 매체보다 시간을 절약해 주는 것 같아요."(30대 주부)

현대인은 ‘TV 없는 세상’을 도무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과도한 TV 시청에 대해 걱정하는 시민단체들조차 좋고 나쁜 프로그램을 가려 보는 안목만 키우면 별로 문제될 게 없다는 정도의 인식에 머물러 있다. 그 이면에는 ‘TV를 끄면 세상에 뒤처지는 게 아닐까’, ‘얘깃거리를 따라가지 못해 학교나 직장에서 왕따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러나 뉴스나 정보를 목적으로 TV를 본다는 주장은 실상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저녁 9시 뉴스가 끝나면 드라마와 쇼, 영화 등을 옮겨 다니며 눈꺼풀이 주저앉을 때까지 TV에 매달리는 게 현실이다.

실제로 TV 끄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TV가 없어도 뉴스를 접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고 말한다. 기자는 직업상 뉴스를 항상 가까이 하지만 퇴근한 뒤에는 신문에서 얻을 수 없는 속보를 주로 라디오를 통해 얻는다. 11년째 TV 끄기를 실천해 온 김명옥(41·여)씨 가족은 신문과 잡지, 책을 통해 세상 소식을 접한다. 그는 "TV가 없으면 세상과의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TV 없이도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친구들에게서 소외되는 것도 아니다. TV 안보기 운동에 참여한 아이들의 반응은 의외로 딴판이다. "집에서 TV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선생님이 친구들 앞에서 칭찬해 주었어요. 처음엔 엄마 아빠가 미웠지만, 지금은 무척 자랑스러워요." "TV 끄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대신 책도 더 많이 읽게 되고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많아졌어요. 친구들도 저를 부러워하고 같이 따라 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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