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가 엄습했던 1998년 초 국내 33개 은행들은 혹독한 생존의 시험대에 올랐다.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 등 5개 은행의 퇴출을 시작으로 은행권에는 대규모 구조조정이라는 ‘1차 빅뱅’이 휘몰아쳤다. 이 과정에서 뉴브리지캐피탈(제일은행) 칼라일(옛 한미은행) 론스타(외환은행) 등 다국적 펀드들은 헐값에 국내 은행을 집어 삼켰다.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SCB)의 제일은행 인수로 외환위기 과정에서 촉발된 은행산업 재편이 7년여 만에 사실상 마무리됐다. 일시적으로 외국계 펀드의 손에 넘어갔던 은행들은 씨티 SCB 등 세계적인 정통 은행자본을 새 주인으로 맞았다. 제일은행 인수전에서 고배를 마신 HSBC도 마지막 남은 외환은행 인수에 잔뜩 눈독을 들이는 등 국내시장 진입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 과도기적인 ‘펀드 경영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정통 선진은행 자본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국민 신한 우리 하나 등 은행대전의 예선전이랄 수 있는 1차 빅뱅의 파고를 넘은 대형 토종 은행들은 "외국 은행에 안방을 내줄 수 없다"며 결사 항전의 태세를 갖췄다. 이로써 ‘대형 토종 은행’ 대 ‘선진 외국 은행’이라는 대결 구도는 한층 선명해졌다. 이제 저마다 나름의 경쟁력으로 무장한 쟁쟁한 국내외 은행들이 ‘2차 빅뱅’의 진검 승부를 예고하고 있다.
국내 소매금융 시장은 2차 빅뱅의 최대 격전지가 될 전망이다. 씨티 SCB 등 정통 은행자본은 선진 금융기법과 자금 조달력을 무기로 국내 소매금융 시장 공략을 공식화하고 있고, 토종 은행들도 생존을 담보로 맞대응을 선전 포고한 상태다.
프라이빗뱅킹(PB) ‘20대 80의 법칙’이 가장 적나라하게 적용되는 곳 중 하나가 은행권이다. 수익에 도움이 되는 20% 고객을 어느 은행이 흡수하느냐에 따라 은행권 판도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어느 은행을 막론하고 초우량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프라이빗뱅킹(PB) 영업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이유다.
부자 고객 영업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곳은 일찌감치 PB 시장에 뛰어든 하나은행이다. 신한 국민은행도 탄탄한 고객 기반을 토대로 점차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추세다. 하지만 PB 경쟁력 자체만 놓고 보면 토종 은행들은 씨티나 SCB 등 선진 은행의 적수가 못 된다. 세계적인 PB 영업 노하우와 상품개발 능력을 지닌 이들 선진 은행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시장을 잠식해 들어갈 지가 핵심 포인트다.
미들 마켓(중소기업 대출) 선진 은행의 진출에도 불구하고 ‘미들 마켓’ 시장은 여전히 토종 은행 간 격전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오랜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형성된 고객층이 쉽게 이탈할 가능성이 적은데다, 씨티나 SCB 등이 특별한 경쟁력을 갖췄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우량 중소기업 고객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신한은행이나 고객층이 두터운 국민 우리은행 등이 승부수를 띄울 수 있는 분야다. 국책은행이기는 하지만 최근 은행대전에 본격적인 출사표를 던진 기업은행도 만만찮은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옛 한미은행이 중소기업 영업에 상당한 우위를 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씨티은행이 이를 기반으로 ‘미들 마켓’ 공략을 시도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모기지 등 가계 대출 씨티 HSBC SCB 등은 국내 진출 이후 자체 대출조직을 가동해 모기지론(장기 주택담보대출) 및 직장인 신용대출 분야에서 공격적인 영업을 해왔다. 모기업의 국제적인 신인도와 자본 조달력을 토대로 가격 경쟁에서 토종 은행들을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특히 SCB는 제일은행이 공격적으로 영업을 펼쳐 온 모기지 상품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이들의 공세에 맞서 주택은행 시절부터 주택담보대출 시장에서 우위를 지켜온 국민은행, 최근 다양한 상품을 출시하며 모기지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신한은행 등이 얼마나 시장점유율을 사수할 수 있을 지가 관건이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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