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他者)가 지옥’이라는 말이 날마다 새로운데, 소설가 김지우 씨는 "인간이 위안"이라고 했다. 그 야박한 실존 선언과 그가 말한 ‘고전적 교훈’의 대치가 이렇게 군침 도는 문장으로도 가능하다. 가령 이런 문장이다.
"오를 적엔 깔꾸막이요 내릴 적엔 비탈길이라. 좆 같은 내 인생 똑 그 짝이 났구나. 지랄허고 아리랑, 옘병헌다 아리라앙… 하다보니 사내는, 내가 언제는 편편한 길 딛고 살았더냐 싶고 통이 대통만해지는 게 세상일이 별것도 아닌 것 같아졌다. 자빠지고 또 자빠지면 내 살인께 궁뎅이야 아프겄제만 물정없이 자빠지랴. 한정없이 아프랴."
징역을 살다 나와보니 마누라는 줄행랑 놓은 지 오래고, 나이 든 홀어머니가 어린 아들놈을 건사하고 있다. 일가붙이 버섯농사 판에 반 종살이로 붙어 근근이 사는? 정월 초하루부터 눈까지 퍼붓는다. 버섯막사 눈 쓸고 내려오는 비탈길에서 주인공 태섭이 풀어놓는 서럽고 막막한 심사라니…. ‘갈수록 힘이 팽기고 고단’한 눈 비탈길 같아도 삶이라는 게 그의 속풀이 사설처럼 ‘물정없이 자빠지’지만은 않는 것이어서 그 눈길을 뚫고 한 여자가 그를 찾아온다. 읍내 이발소 면도사 ‘정양’이다. "데면데면하지 않을 정도의 눈인사나 상긋이 건네는 것이 고작이었"던 터이지만 딴에는 호감을 가졌던 것이다. 지나치는 말로 설에 찾아가겠다던 것을 태섭 역시 반신반의하면서 내심 기대했지만, 금고털이의 ‘거사’를 벌이자며 찾아온 감방 동기조차 마을에 오를 엄두를 못 내던 그 악천후에, 그것도 일가 집에 들러서 ‘제 스스로 며느리라고 명토박고 나왔’다는 것 아닌가…. "사내는 가슴이 벌렁벌렁 뜸베질을 치는 한편으로 난감"하다. 하지만 그 ‘난감함’은 첫 새벽 버섯막사 눈 치고 오던 비탈길에서의 앞날에 대한 숨막히던 난감함이 아니다. "한정없이 퍼부을 것 같던 눈이 그친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으나, 인날 궂은 일진이 예서 멈출지는 더 두고 볼 일이었다."
첫 소설집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창비 발행)’의 끝에 실린, 그의 데뷔작 ‘눈길’은 근래 보기 드문 문장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그 향기는 흔전한 우리말과 속담들이 정밀하게 제 자리를 차고 앉은 문체의 향기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소박하고 따뜻한 서사의 품이, ‘인간이 위안’이라는 그의 말을 생광스럽게 되새겨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책의 다른 소설들은, 작가의 말처럼 "일상에 녹아 있는 부당한 권력을 응시하고, 저항하고, 비판하고, 부정하는" 작은 몸부림 같은 이야기들이다. 자해공갈단을 소재로 쓴 ‘디데이 전날’을 읽고 나면 그들의 사회악적 면모보다 인간적인 동질감이 느껴지는 것도 그가 말한 ‘부당한 권력’, 즉 그렇게 밖에 살지 못하게 만든 비정한 자본권력의 이면을 함께 본 끝이기에 가능하다. 그것은 작가가 궁극적으로 응시하고자 한 것이 ‘부당한 권력’이 아니라 ‘위안으로서의 인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문학평론가 황광수 씨는 해설에다 "이 소설집은 일상의 경계 밖으로 밀려날 위기에 처한 개인들의 고통에 밀착된다는 점에서 사람 냄새를 짙게 풍기는 대신 첨단적인 사상에 대한 지적인 제스처나 요즘 유행하고 있는 서사의 해체를 통한 소설미학적 유희를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썼다. 즉 "사상적 미학적 심리적 차원에서 포스트모던한 인간형을 보여주지 않는 대신 요즘 지식인들이 외면하고 있는 사회 불평등과 왜곡된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가장 무겁게 침전된 사회의 밑바닥을 맨손으로 더듬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집이 나온 뒤 두 번을 통독하고 자성했다고 한다. "소설을 통해 뭔가를 전해야 한다는 의식이 지나쳤던 것 같아요.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간 탓에 미학적으로 유연하지 못했어요." 그것이 ‘소설미학’의 결핍인지, ‘소설미학적 유희’의 배제인지는 독자들이 살필 일이고, 다만 밝혀둘 일은 이미 상품으로 나온 작품에 대해서조차 그는 준열한 시선을 풀지 않더라는 점이다. 그 시선은 소설에서 보인 ‘부당한 권력’과 ‘위안으로서의 인간’을 응시하던 그 시선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위안’일지 모른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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