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재학 기자가 체험한 TV를 끄면 인생이 보인다] (2) 아이와 가정을 망치는 TV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재학 기자가 체험한 TV를 끄면 인생이 보인다] (2) 아이와 가정을 망치는 TV

입력
2005.01.07 00:00
0 0

초등학교 4학년인 우리 집 둘째(아들)의 주된 관심사는 ‘몸매’다. 키는 작은데 배가 조금 나온 게 몹시 거슬리는 모양이다. 아빠가 퇴근하면 누구 배가 많이 나왔는지 비교해보며 걱정을 한다. 솔직히 아파트 복도를 뛰어다니는 또래들 몸매를 보면 걱정스럽다. 우리나라 초등학생 10명 중 3명이 비만이라는 통계가 정말 실감이 난다.

요즘 아이들이 즐겨 먹는 과자나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 주전부리를 보면 예외 없이 TV 광고에 자주 나오는 제품들이다. 아이들은 TV를 보면서도 절대 입을 놀리는 법이 없다. 프라이드 치킨이나 피자 등 인스턴트 식품과 탄산음료, 스낵 등을 끊임없이 먹어댄다.

TV 시청은 별다른 육체적 활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TV 화면은 각종 음식과 먹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노출하며 아이들의 식욕을 자극한다. 가만히 앉거나 누워서 연신 먹어대니 살이 찌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비만이야 음식을 조절하고 운동을 통해 해결할 수도 있다지만, 정신적인 피해는 평생 가족의 짐이 된다. 소아정신과 전문의들은 "TV는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TV에 빠질수록 나중에 약물 술 담배 등에 중독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과도한 TV 시청은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빼앗아가는 주범"이라고 경고한다. 실제로 소아정신과 환자 중에는 지나친 TV 시청으로 언어발달장애나 각종 신경증상을 보이는 어린이들이 의외로 많다.

주부 김모(36)씨는 아들이 생후 6개월 무렵부터 종일 한글 교육용 비디오와 케이블 TV의 영어만화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주위 엄마들이 경쟁적으로 조기교육에 나서는 데다 ‘가만히 놔두면 우리 애만 뒤처지지 않을까’라는 조바심이 생긴 탓이다. 울며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데는 TV만한 게 없다는 자신의 육아경험에서 나온 ‘이기심’도 작용했다.

실제로 아이가 아무리 울며 칭얼대도 TV나 비디오만 틀어주면 금방 조용해졌다. TV와 비디오 시청이 반복되면서 아이는 TV를 끄면 잠을 자지 못할 정도가 됐고 자라면서 점차 언어장애까지 나타났다. 만 4세가 넘도록 말을 제대로 못해 소아정신과를 찾은 결과, 부모의 과잉교육열이 초래한 ‘유아 비디오 증후군’으로 진단됐다.

김씨와 같은 사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린 자녀에게 TV나 비디오를 몇 시간씩 보여주며 집안일을 하거나 친구들과 장시간 전화를 하는 엄마들의 모습은 흔한 풍경이다. 많은 부모들이 ‘가능한 한 어렸을 때부터 시청각 자극을 가하는 게 자녀의 언어능력 계발이나 지능발달에 도움이 된다’라는 맹신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기시청각 교육은 부작용이 훨씬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미국소아과학회(AAP)는 영·유아에게 TV 비디오 전자오락 컴퓨터 등의 접촉을 금지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특히 만 2세 미만 어린이에게 TV를 많이 보여주면 뇌 형성에 장애가 생겨 말이 늦되고 지능발달이 더디며 사회성에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연세대 의대 신의진(소아정신과) 교수는 "어린이는 생후 8~9개월부터 부모나 주변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성을 획득한다. 어렸을 때부터 TV나 비디오에 빠져 자란 어린이는 커서도 수동적이 되고 ‘TV 의존증’을 보이며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 데 곤란을 느끼게 된다"고 지적한다.

영ㆍ유아기에 TV 시청시간이 하루 1시간 늘어날 때마다 취학연령이 됐을 때 주의력에 문제가 생길 위험이 10%씩 높아지며 언어발달이 지연될 확률은 최고 2배나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12년째 ‘TV 안보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숙명여대 서영숙(가정아동복지학) 교수는 "어린이의 과잉 TV 시청은 각종 정신장애를 초래하는데도 마치 일찍부터 TV나 비디오 등 시청각 자료를 접해야만 뇌를 깨운다고 잘못 알려져 있어 안타깝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 TV를 많이 볼수록 나중에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뉴욕주립 정신의학연구소가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TV 시청시간이 하루 1시간 미만인 아이들은 10대 후반부터 20대 전반기까지 강도 등 범죄를 저지른 비율이 9.1%였으나, 시청시간이 1~3시간인 아이들은 28.0%, 3시간 이상은 39.9%로 급증했다.

미국의 소아과전문의 로버트 세지 박사는 "TV는 행동을 모방하고 배우는 어린이들의 타고난 능력을 부추긴다. TV의 폭력은 신속하고 일관성이 없고 효과적이며 보상을 받는다. 악당이 하는 것만큼 자주 영웅에 의해서도 자행된다. TV가 생생히 묘사하는 폭력과 그것에 대한 무언의 찬성은 폭력을 어린이들이 모방하는 매력적인 행위로 만든다"라고 설명한다.

어른이라고 TV의 피해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고백했듯이, 기자는 불과 2년 전까지 ‘TV 중독증 환자’였다. 집에만 들어가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벌렁 누워 TV만 봤다. 모처럼 일찍 들어온 아빠와 놀고 싶어 아이들이 달려들어도 "아빠 피곤하니까 숙제나 하라"며 물리치기 일쑤였다. 상담차 학교를 찾는 것도,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항상 아내 몫이었다.

TV 채널 이리저리 돌리기가 취미가 돼버린 남편에게 아내 역시 찬밥 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속 깊은 얘기를 나눈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아내의 불평에도 귀를 닫아버렸다. 가족과 관계를 맺을 소중한 시간을 TV 앞에서 허비하는 동안, 아빠와 남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전락했다.

TV 앞에서는 늘 혼자다. TV 시청에는 서로 감정을 주고 받는 인간적인 체험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특정한 자극의 수용을 강요당하는 ‘일방통행적 경험’일 뿐이다. 종일 TV를 켜놓고 지내는 가정에서 가족 간의 따뜻한 정이나 대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TV를 끄면 가족이 보이고 인생이 보인다. 가족간 단절의 벽이 무너지고 대화가 살아난다. 이제 TV를 끄고 행복을 켠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자.

<다음은 14일자에 게재>

■ TV 많이본 초등생 학습력/ 보통 학생의 80%에 불과

습관적으로 TV를 끼고 사는 아이들은 대개 성적이 나쁘다. TV는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생각하는 능동적인 사고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대장금’이나 ‘파리의 연인’과 같은 밤드라마를 보고 나서 숙제를 해결하기엔 너무 시간이 없는데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 집중력이 떨어져 효율적인 공부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학교나 학원에서 돌아온 자녀가 방에 틀어박혀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부모가 거실에서 뉴스나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공부방에 앉은 아이의 귀도 TV를 향하기 마련이다. 눈은 건성으로 책을 보고 있지만, 주의가 흐트러져 투자하는 만큼 효과를 보기 어렵다.

TV를 끄면 당연히 성적이 올라간다. 그 이유는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의 모든 장기는 태어날 때부터 어른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유독 뇌는 자라면서 구조와 기능이 계속 변화해 사춘기가 지나야 어른과 비슷해진다. 즉 두뇌 발달은 적어도 만 4~5세까지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어린 시절 뇌의 발달에는 부모나 형제 등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필수적이다. 이런 직접적 상호작용에 의해 두뇌발달이 촉진되면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사회성 발달, 정서 발달, 인지 발달 등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시기에 TV나 비디오 등 가상의 자극을 많이 접하면 부모와의 상호작용이나 환경자극을 통해 얻는 경험들이 줄어 의사소통의 장애와 사회성 발달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인간의 뇌는 단계적으로 발달하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아무리 주변에서 고난이도의 지적 자극을 줘도 수용이 불가능하다.

이는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의 인지이론에서도 확인된다. 피아제는 만 1세 이전까지 직접적, 감각적 경험 없이는 사고가 불가능하며 2~3세부터 상상력이 가능해진다고 설명한다. 즉 영·유아기에는 사람 및 자연과의 직접 경험이 아동의 발달 수준에 가장 적합한 지적 자극이라는 것이다. 어린이는 학령기에 이르러야 집합개념 등의 논리적 사고력이 가능하며, 만 10~11세가 돼야 완전한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주변의 자극에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본능적으로 노력한다. 일방통행적이고 간접적인 경험을 주로 하는 TV나 비디오 시청은 아이들을 수동적 인간으로 만들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학습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린다. 미국에서 수행된 연구결과를 봐도 TV를 많이 시청한 초등학생의 읽기능력과 사고력은 보통 학생들의 80% 수준에 불과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