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目)이 빠진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다. 겨울로 접어든 12월 한달을 꼬박 눈(雪)을 기다렸으니….
구랍 31일 마침내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접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무작정 스노체인, 아이젠, 방한복을 챙긴 뒤 지도를 펼쳤다. 목적지로 대관령을 낙점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눈이 내리기도 하거니와, 날씨가 추워 한 번 내린 눈이 잘 녹지 않아 순백의 세상을 만날 가능성이 높은 까닭이다. 대관령 옛길, 선자령 등 다양한 눈꽃트레킹 코스가 있고, 이국적인 느낌을 맛볼 수 있는 목장들도 여럿 있다.
강원 평창군 횡계리 삼양대관령목장은 이중에서도 꽉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장쾌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유난히 힘들었던 묵은 해의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찬 새해를 설계하기에 제격이다. 백두대간의 허리 오대산을 낀 ‘동양최대의 목장’,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고원 평탄지’, ‘동양의 알프스’ 등 화려한 수식어가 결코 무색하지 않다.
대관령으로 향하는 영동고속도로는 오후가 되자 차량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새해 일출을 보러가는 행렬이다. 차량대열에 끼기는 했지만 조금은 다른 목적이라 기분이 묘하다. 이방인이 된 느낌이랄까.
횡계IC를 나오면서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됐다. 톨게이트를 나서자 마자 도로 오른쪽으로 황태덕장이 펼쳐진다. 강원 인제군 용대리와 함께 대표적인 황태의 고장이다.
덕장에 명태를 너는 주민들의 얼굴이 유난히 밝다. 평창이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후보지로 최종 선정됐기 때문이다. 4년간의 절치부심끝에 얻은 유치권이라 표정이 더욱 밝을 수 밖에. 희망에 찬 그들을 보노라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일기예보를 너무 믿었던 탓이었을까. 한 해를 마감하는 31일 대관령일대의 하늘은 너무도 깨끗했다. 열대지방의 푸르디푸른 바다를 보는 느낌이었다. 눈 올 기미는 커녕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다. 괜한 불안감이 앞선다. 횡계시내를 지나 비포장 산길을 달려 마침내 목장에 도착했다. 오후 4시를 겨우 넘겼지만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고산지대에 위치한 터라 해가 빨리 진다는 것이 목장측의 설명이다.
운이 좋았나 보다. 하늘이 잔뜩 찌푸려지면서 흰색 가루가 제법 흩날리더니 이내 함박눈으로 변했다. 한 시간 남짓 내린 눈이었지만 제법 백색세상을 만들어낸다. 새해 첫날 달라져있을 세상을 기대하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대관령(평창)=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순백의 색상/ 대관령 목장
1월1일. 새해가 밝았다. 4륜구동에 몸을 싣고 본격적인 투어에 나선다. 목장은 우선 규모에서부터 관광객을 놀라게 한다. 600만평에 초지면적만 450만평이다.
목장을 따라 난 도로, 등산로를 모두 합치면 120㎞가량. 이중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길만 30㎞를 넘는다. 매표소(해발 850m)에서 소황병산(1,430m)까지 완만한 구릉으로 이뤄져 시야가 확 트여있다. 마치 하늘이 열려있는 듯하다. 천지가 흰색 파우더로 화장을 한 탓에 더욱 화사하다.
매표소에서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동해전망대(1,140m)로 이어지는 4㎞가량의 길은 초대형 야외세트장을 방불케 한다. 대관령목장은 한류열풍의 시작을 알렸던 드라마 ‘가을동화’의 주 촬영지. 주인공 은서와 준서의 집을 비롯 그들이 이름을 새긴 나무, 주인공이 노닐던 자전거하이킹도로가 연이어 펼쳐진다.
‘태극기 휘날리며’ ‘연애소설’ ‘바람의 파이터’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바람의 전설’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됐다. 오죽하면 사극은 한국민속촌, 현대극은 대관령목장이라는 말이 있을까.
동해전망대에 섰다. 대관령목장의 장엄한 광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서쪽으로 황병산, 소황병산이 손에 잡힐 듯 하다. 명승2호로 지정된 소금강 등반코스도 지척이다. 남으로는 국내 최대의 스키장인 용평리조트가, 북쪽에는 매봉(1,173m)이 자리하고 있다. 동쪽의 경관은 더욱 웅장하다. 곤신봉(1,130m), 선자령(1,157m)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너머 강릉시내와 주문진항이 손짓한다. 밤이면 오징어잡이배가 밝힌 어화(漁火)를, 아침이면 동해의 현란한 해맞이를 감상할 수 있다.
간밤에 내린 눈은 갈색으로 변해버린 초지를 살포시 덮었다. 목장 한 가운데 지난 여름 새롭게 들어선 풍력발전기가 보태져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들어놓았다. 현재 4개의 발전기가 들어서있지만 수년내에 50개 가량의 발전기가 추가로 설치되면 대관령목장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전망이다.
구름이 잔뜩 하늘을 가린 탓에 예정보다 훨씬 늦은 해가 서서히 목장의 아침을 알린다. 다시 차를 몰아 소황병산에 올랐다. 목장내에서 차량이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다.
부드러운 곡선의 굴곡이 만들어내는 목장의 능선에 눈이 엷게 끼었다. 순간 여기가 어디인가 착각이 든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첫 장면을 떠올린 탓이다. 금방이라도 주인공 마리아가 나타나 한바탕 춤이라도 출 것 같은 분위기이다. 매표소로 돌아오는 계곡길은 은빛 옷으로 갈아입었다. 풍요로운 모습이다.
대관령(평창)=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순백의 세상/ 목축에서 관광목장으로
광활한 설원·촛불축제 '동양의 알프스'
삼양대관령목장이 대관령 자락에 둥지를 튼 것은 1972년이다. 삼양식품이 황병산 자락의 고산유휴지를 목초지로 개발, 동양최대의 목장으로 일궈놓은 곳이다. 한 때 3,000마리 이상의 소가 뛰놀았으나 지금은 600마리 정도만 남아있다. 목축사업이 예전만 못한 탓이다.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지금 대관령목장은 관광목장으로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우선 드넓은 초지는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태학습장이다. 봄이면 방목된 젖소와 양떼, 파랗게 솟아나는 잔디가 이국적인 세상을 만들어낸다. 목장의 여름은 야생화천지. 분홍마늘꽃, 만병초, 말나리, 매화노루발, 물봉선, 큰제비고깔, 무릇 등 500여종의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고 진다. 제2단지로 가는 계곡은 가을이면 만산홍엽을 이루고, 겨울이면 순백의 세상을 펼쳐낸다.
자연만 감상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즐길 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ATV(4륜 오토바이)로 목장 곳곳을 누비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고, MTB(산악자전거)를 타고 가을동화의 주인공이 다닌 길을 따라 드라마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백두대간의 허파격인 설악산, 오대산을 거쳐 대관령을 지나는 중간지점에 위치, 대간을 종주하려는 산악인들의 방문도 끊이지 않는다. 선자령, 소금강까지 등산로가 나있어 이 곳을 두루 연계한 산행도 추천할 만하다.
대관령목장의 겨울은 또 다른 세계를 빚어낸다. 얼음이 얼어붙은 계곡일대는 썰매장으로 변신, 가족단위 관광객들을 동심의 세상으로 안내한다. ‘가을동화’ 은서ㆍ준서집앞에서 썰매를 무료로 대여한다.
좀더 많은 눈이 내리면 목장은 이색 눈썰매장으로 바뀐다. 목장에서 나눠주는 비닐 비료포대 하나만 있으면 만사 OK. 경사가 있는 곳마다 비닐썰매를 즐기는 모습은 대관령목장에서만 볼 수 있는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비싼 돈을 들여 스키장을 갈 필요도 없다. 눈덮인 목장은 국내 최대의 크로스컨트리 스키장이 된다. 스키장비를 가지고 오면 이 역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보다 짜릿한 스릴을 즐기고 싶다면 스노모빌을 이용하면 된다. 스노모빌은 스키장에서 환자수송이나 화물운반 등을 위해 사용되는 특수자동차. 안내자가 유도하는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여기가 과연 한국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ATV뒤에 바나나보트와 유사한 스노바나나를 달고 설원을 질주하는 이색체험도 만끽할 수 있다. 입장료 일반 5,000원, 단체 3,500원. 투숙객은 2,500원. 문의 해피그린 (033)336-1234, 0885. www.happygreen.net
밤이 되도 목장의 하루는 끝나지 않는다. 수천개의 초가 은빛세상을 밝히는 ‘제1회 대관령스노캔들축제’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안내소옆 1만평규모의 부지에 마련된 축제장은 3,000여개의 초가 밤을 밝힌다. 별빛거리, 은빛거리를 따라 러브포토, 작은 조각빛, 물위의 빛, 꿈의 탑, 별자리 등 다양한 형태로 장식된 초의 향연을 관람할 수 있다.
독일의 동화속 정원을 꾸며놓은 메르헨에서는 가족과 연인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벤트도 준비된다. 스노캔들의 원조격인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꾸며놓은 특별전시장도 마련돼있다. 일반 3,000원, 어린이 2,000원. www.snowcandel.co.kr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여행수첩
▲ 가는 길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경부나 중부고속도로를 이용,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횡계IC에서 빠져나온다. 횡계시내에서 로터리를 끼고 좌회전한 뒤 6㎞가량 비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면 삼양대관령목장과 만난다.
서울 동서울터미널과 상봉터미널에서 횡계행 시외버스를 타고 간 뒤 횡계시내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택시요금은 1만원가량 나온다.
▲ 먹을 거리
횡계는 황태덕장으로 이름난 곳이다. 황태는 노란 명태이다. 명태를 말리는 과정에서 색깔이 변한 것이다. 명태는 동태, 복어, 생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 중 가장 몸값이 비싼 것이 황태이다.
황태는 원래 북한의 청진과 원산지역 주민들이 명태를 말려 겨울나기용 음식으로 이용하던 데서 시작됐다. 횡계와 인제의 용대리에 덕장이 생긴 것은 청진지역처럼 겨울철 일교차가 크기 때문. 새벽에는 영하 15도이하로, 낮에는 영상기온을 유지하면 명태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노란색을 띄게 되는 것. 속살이 부드럽고 고소한 것이 특징이다.
황태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은 기후만이 아니다. 수작업으로 수시로 뒤집어 주면서 골고루 건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오죽하면 식탁에 오르기까지 33번 손길을 거쳐야한다는 말이 있을까. 이렇게 만들어진 황태는 저지방에 칼슘과 단백질이 풍부해 겨울을 대표하는 웰빙음식으로 자리잡았다.
황태가 유명한 만큼 황태전문음식점도 많다. 용평리조트 입구에 자리잡은 황태회관(033-335-5795)은 주인이 직접 덕장을 운영하고 있다. 황태해장국, 황태구이, 황태찜, 황태불고기, 황태전골, 황태냉면까지 10여가지의 황태관련 메뉴를 내놓고 있다. 규모도 횡계리 일대에서 가장 크다.
송천회관(335-5942), 횡계식당(335-5388), 노다지(336-4440) 등이 이름나있다. 삼양대관령목장내 식당인 미래성에서도 황태로 만든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평창에서 나는 신선한 산채를 맛보고 싶다면 부일가든(033-335-4002)을 찾아야 한다. 1970년대초부터 입소문이 나기 시작, 지금까지 꾸준히 손님들이 찾고 있는 평창의 명가음식점이다. 30년 가까이 산채백반 한가지로 승부를 걸고 있다. 버섯, 손두부, 애호박, 감자, 풋고추를 넣어 만든 된장찌개와 오대산일대에서 나는 각종 산채와 동해안에서 온 젓갈과 생선 등을 맛보려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 잘 곳
목장내에 150명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30여개의 콘도형 숙소가 마련돼있다. 4인기준 10만원안팎이며, 주중이나 비수기에는 30%가량 할인된다. 목장과 멀지 않은 곳에 용평리조트가 있어 숙박업소는 많은 편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스키시즌으로 들어가면서 방잡기가 쉽지는 않다.
미리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 국내 최대규모의 스키장시설을 자랑하는 용평리조트(033-335-5168)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숙박업소를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드래곤밸리 호텔에서 다양한 콘도시설까지 객실만 1,500개를 넘는다.
그린앤블루호텔(335-4450), 신세계대관령리조트(335-5011~5), 산마루가든(335-2599), 장수민박(335-514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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