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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의 판결 들여다 봤더니…/ "남편죽인 원수 살해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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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의 판결 들여다 봤더니…/ "남편죽인 원수 살해 무죄"

입력
2005.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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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현대적인 사법체계가 막 자리잡기 시작한 1900년대 초반의 법률문화는 어땠을까. 법원도서관(손용근 관장)은 6일 우리 사법권이 일제에 넘어갔던 1909년부터 1912년 사이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지금의 대법원)에서 선고된 민·형사 사건 170여건의 판례를 담은 ‘고등법원판결록’을 번역, 발간했다. 자료가 일본어 고문어체로 작성된 탓에 해독이 어려워 사실상 방치돼 왔던 이 판례들은 당시 시대상과 법생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 원수 살해는 무죄

1910년 이모씨는 김모씨의 집에서 말다툼을 하다 김씨에게 맞아 사망 직전까지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씨의 처 홍모씨와 첩 엄모씨는 동네사람들과 함께 김씨 집으로 달려가 일단 김씨를 묶어 놓고, 이씨를 살리려고 몸을 덥히는 등 애를 썼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격분한 홍씨와 엄씨는 그 자리에서 묶여 있는 김씨를 때려 살해한 뒤 자수했고, 즉시 살인죄로 기소됐다. 하지만 법원은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친족이 살해되는 것을 목격한 가족이 그 살인자를 그 자리에서 살해(등시살사·登時殺死)했다면 사람의 감정에 비추어 죄를 논할 수 없다는 당시 형법대전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 김좌진 장군의 강도죄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 장군은 21세 때인 1911년 북간도 독립군 사관학교 설립에 필요한 군자금 조달을 위해 증조부인 김종근씨를 찾아갔다가 경찰에 체포돼 ‘강도죄’로 확정판결을 받았다. 일제 고등법원은 "피고인 김좌진은 안승구 등과 함께 김종근 집에 돌입해 재물을 강취할 것을 공모하고, 김좌진은 다른 자를 인도해 김종근의 저택 부근에 이르렀는데 그 집 안에 여럿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착수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떠났다"고 언급했다.

법원은 "나는 집만 가리켜 주고 범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김 장군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형법대전의 강도죄를 적용해 징역 2년 6월을 선고했다. 김좌진 기념사업회는 당시 일제 치안 당국이 김 장군의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강도범죄로 몰아 탄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조선의 관습이 곧 법

판결록에는 조선의 관습을 판단 근거로 삼은 판례가 많다. 구체적인 실상을 규정하는 법률이 절대 부족했던 당시 현실에 비춰 상당수 판결에 법 대신 관습이 판단근거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조혼은 당시 흔한 풍습이었다. 부모 간 합의에 따라 11세 송모군과 18세 때 결혼한 김모양은 일본 남성과 잠자리를 함께했다 간통죄로 기소됐다. 변호인은 남녀 각각 17, 15세를 결혼가능 연령으로 규정한 일본 민법을 들어 이들의 결혼이 무효이므로 간통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조선인 사이에는 연령과 상관없이 혼인이 유효한 것이 관습"이라며 상고를 기각했다.

이밖에 ‘재혼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대부가에서 재물을 받은 뒤 재혼을 했다면 비록 과부의 재가가 법률상 허용된다 하더라도 받은 재물을 돌려주어야 한다’ ‘창녀라는 직업은 일정한 단속 하에 존재가 인정되므로 창녀를 사고 파는 행위도 효력이 인정된다’ 등의 판결도 지금 현실과는 사뭇 대비되는 사례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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