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5월. ‘강철의 도시’로 알려진 우크라이나 남부 공업도시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에 소련의 탄도 미사일 생산을 위한 시설이 조용히 만들어졌다. 자동차 공장을 개조해 만든 이 시설에는 ‘소련 국영공장 제586호’라는 이름과 함께 세계 최고의 미사일 개발 및 생산이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로부터 50여년이 흐른 지금, 독립 국가인 우크라이나에 속한 제586호 공장은 미사일 대신 우주 개발을 위한 최첨단 장치를 개발하는 연구 및 설계시설로 거듭났다. 극도의 보안 속에 유지되던 이 시설은 ‘남쪽’이라는 뜻의 우크라이나어를 따서 ‘유즈나 설?연구소(유즈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 냉전 이후 우주 개발 본격 추진 = 늘어선 공장 사이로 눈보라가 치던 지난해 12월 말. 냉전 시대만큼은 아니겠지?유즈나로 들어가기 위한 절차는 쉽지 않았다. 사전 약속한 직원들이 차로 동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은 의자 아래까지 꼼꼼히 수색했다. 사진 촬영과 인터뷰 녹음 등은 모두 금지됐고 준비해간 카메라와 녹음기는 물론, 휴대폰까지 모두 직원의 손에 넘겨졌다.
잔뜩 긴장한 채 시설로 들어선 기자는 다시 한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10여명의 국장급 인사들이 나와 따뜻이 환대해줬기 때문이다. 이들은 "1990년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우크라이나와 유즈나는 세계 각국과 매우 빠르게 협력을 확대해가고 있다"며 "지금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과의 관계도 조만간 결실을 맺기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연구+생산 시설 모여 단지 형성 유즈나의 가장 큰 장점은 우주 관련 장비 생산시설인 ‘유즈마쉬’와 함께 복합 단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설의 정확한 규모나 인력은 1급비밀로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무기 개발이 한창이던 1980년대 유즈나에서 일하는 사람만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냉전 시절 경쟁적 무기 개발의 상징이자 ‘사탄(Satan·악마)’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으로 불리는 SS-18 미사일도 유즈나의 작품이다.
우주시스템 개발국 빅토르 오부코브스키 국장은 "당시 소련은 미사일이 더 멀리,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발사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려고 노력했다"며 "이 같은 기술은 우주 기술과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어 냉전이 끝나자마자 유즈나는 본격적으로 우주 관련 장비 개발을 주력사업으로 삼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 사이클론2-K 25년 동안 실패율 = 0% 현재 유즈나에서 개발하고 설계해온 장비는 위성 발사체를 비롯해 과학 및 통신위성 등 수십 종에 이른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소련 시절 개발한 위성 발사체 ‘사이클론’ 시리즈. 1969년 첫 발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이 시리즈의 ‘맏형’ 사이클론2-K는 세계 최초로 전과정이 자동 조절되는 발사체로 유명하다.
77년 사이클론-3에 이어 사이클론-4가 등장한 지금까지 사이클론2-K는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해 3월 31일까지 사이클론2-K가 수행한 발사는 총 104개에 달하며 실패율은 0%다.
◆ 공중 발사 등 미래형 기술 개발 박차 = 마케팅국 게나디 바르야니츠코 국장은 "현재 유즈나의 가장 큰 화두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우주 장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 가지 예로 비행기에 발사체를 실어 우주로 쏘아올리는 공중발사 시스템 ‘스페이스 클리퍼(Space Clipper·우주 범선)’를 들었다. 이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완성되면 비용 감축은 물론, 땅에서 발사할 때 만들어지는 환경 오염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국제협력국 알렉산더 데그리야레브 국장은 "발사로 인한 환경 오염이 세계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스비트야즈-1M’ 같은 미래형 발사체들은 일반 비행기에 쓰는 연료로 큰 추진력을 낼 수 있도록 고안돼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시설"이라고 강조했다.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김신영기자 ddalgi@hk.co.kr
■ 에두아르드 쿠즈네소브 NSAU 부국장/"우주개발 국제협력없인 불가능 한국 ‘초소형위성’ 주도해볼만"
1992년 만들어진 우크라이나 우주항공국(NSAU)은 국가의 우주 정책과 개발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구다. NSAU의 책임자인 국장은 장관급이다. 우주 관련 정책만을 관할하는 장관급 부처를 설치한 나라는 세계에서 우크라이나가 유일하다. 수도인 키예프 중심부에 위치한 NSAU에서 에두아르드 쿠즈네소브 부국장을 만나 우크라이나 우주개발의 밑그림과 우리나라와의 협력 가능성에 대해 조언을 들었다.
_구 소련 시절과 독립 후의 우주 개발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
"구 소련의 우주 개발 기술 중 30% 정도가 우크라이나에서 나왔다. 대부분 미사일 등 무기개발 기술에 기반해 이뤄졌기 때문에 두 영역 사이를 효과적으로 조율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실제로 독립 직전인 1980년대 후반, 유즈나 설계 연구소와 유즈마쉬 생산 공장에서는 미국과 그 우방을 겨냥해 1년에 100개가 넘는 미사일을 생산했다. 그러나 독립 후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은 이 같은 기술이 파괴보다는 삶의 질 향상에 쓰일 수 있다고 믿고 러시아에 군사적 목적의 개발은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_독립 이후 설치된 NSAU가 가장 주력한 분야는.
"우크라이나의 우주 계획은 3단계로 진행돼 왔다. 개인적으론 국제 사회와의 협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국가도 단독 예산으로 우주 개발이라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 독립 후 많은 나라에서 과학자들을 초청하고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지금은 전 세계 18개 나라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4개국이 공동으로 1999년 3월 완성한 바다 발사 프로젝트 ‘씨런치(Sea Launch)’의 발사체 제닛3-SL 역시 우크라이나의 작품이다. 국제시장 확대를 위해 노력한 결과, 세계 상업위성 시장의 약 8%를 점유했다."
_현재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인데도 우주 개발에 주력하는 이유는.
"우주 기술에서 앞서간다는 것은 단순한 기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우주 개발 선진국은 국민 교육과 과학기술 수준이 뛰어나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릴 수 있다. 기초 과학과 관련 산업 등을 함께 발전시켜 상당한 경제효과도 거둘 수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우주 개발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은 약 6만 명에 달하며, 이 중 상당수는 교육 수준이 매우 높은 고급 두뇌다."
_한국 우주 개발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우선 다른 나라와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미국이나 러시아 등 대형 국가와의 협력을 우선하는 것 같다. 물론 큰 나라와의 협력도 중요하지만, 좀더 작은 국가들과 힘을 합쳐 더 구체적인 성과를 이룰 수도 있다. 미국의 달 탐사나 러시아가 주도하는 국제우주정거장, 혹은 중국이 세계를 놀라게 한 유인 우주선 등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멋져 보인다고 무조건 덤비는 것은 위험하다. 한국이 이미 앞서가는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 도전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반도체나 나노 기술 등은 최근 전세계가 과학적 연구를 위해 주목하는 ‘초소형 위성’에 크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키예프=김신영기자
■ 기고/ "우주기술 산업적 활용… 한국과 협력 기대"
우크라이나는 1990년 독립 이후 구 소련 시대에 쌓아온 기술을 토대로 세계 우주개발 무대에 본격 진입했다. 1992년 2월 우크라이나 우주국(NSAU) 창설은 우주개발정책을 가속화하려는 국가 차원의 첫 걸음이었다.
NSAU 설립 목표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개념 위주로 된 중장기 우주 계획을 우주 탐험 등 세부 과제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아울러 ▦우주 개발이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국가 안보의 수준을 끌어 올리며 ▦다른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도 NSAU의 역할이다. 요즘은 경쟁력 있는 발사체, 우주선, 통신위성 등을 개발하는 것과 함께 지구 원격측정 데이터 시스템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우주 탐사까지 발을 넓히는 등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우주 개발은 10년을 기준으로 짜여진 ‘국가 우주 중장기계획’에 맞춰 진행 중이다. 이 계획의 가장 큰 목표는 지금까지 개발된 기술을 활용해 우크라이나의 우주적 잠재성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1993~97년 진행된 1단계 계획은 국가 경제와 안보를 위해 우주 관련 연구·개발을 지속하며 국제 무대에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98~2002년은 국내 시장을 활성화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 우주 관련 제품과 서비스를 수출로 연결할 수 있도록 노력한 시기였다.
현재 진행 중인 3단계(2003~2007년)는 우주 개발이 우크라이나의 경제 과학 기술 등의 발전에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영역을 확장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이를 위해 국제적 사용자의 특성에 따라 맞춤 상품을 생산하고, 우주 기술의 산업적인 측면을 부각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와 한국의 우주항공 분야 협력은 거의 없었다. 우크라이나가 지금까지 쌓아온 우주 기술과 한국의 효율적인 산업적 시스템이 합쳐져 양국의 우주 개발이 크게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게오르기 크린스키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 과학담당 1등 서기관 cience@ukremb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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