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를 출발한 비행기는 5시간이나 늦게 출발했지만, 정확하게 1월1일 자정 아체주(州)의 수도 반다 아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난민수용소 같았다. 여기저기 누워 있는 부상자들 틈으로 구호물자를 나르는 자원봉사원이 바쁘게 오갔다. 한국 구호팀으로는 가장 먼저 도착한 국제기아대책기구 서원석 부총재와 20여명의 대원은 새해 첫날 아침부터 의료반과 구조반으로 나누어 활동을 시작했다. 의료반이 찾은 마따위 난민촌에서는 2,000여명의 난민이 텐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지진해일에 휩쓸려 바다로 밀려갔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다. 얼굴과 몸이 햇볕에 타 피부가 벗겨지고 구호품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솟은 마스지드는 반다 아체시의 상징인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이다. 다행히 붕괴되지 않았지만 건물 벽면이 갈라지고 타일이 떨어져 나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앞길을 따라 늘어선 반다 아체 바자르는 이번 해일 피해를 가장 크게 본 곳이다. 곳곳에 서 굶주린 개와 고양이들이 시체의 살점을 뜯어 먹고 있어 섬뜩한 분위기였다. 시가지 중심을 통과하는 아체강 다리 아래에는 시신들이 그대로 물에 떠 있었다. 수백구는 되는 듯했다.
2일 오후에는 미 항공모함 에이브라햄 링컨호에서 발진한 헬기들이 고립된 해안 마을에 구호품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헬기 한 대당 두 명씩 기자를 탑승시키고 서부 해안을 따라 날아가며 물과 식료품을 투하했다. 반다 아체에서 서쪽으로 30여㎞ 떨어진 롱아 해변에 커다란 공장건물이 보였다. 한 눈에 한국인 실종자 은희천씨가 일하던 프랑스 회사 소유의 시멘트 공장임을 알 수 있었다.
3일에는 육로로 시멘트 공장을 찾았다. 20여㎞ 떨어진 지점에서 끊어진 교량을 만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차에서 내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니 거대한 시멘트 공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곳 저곳 흉물스럽게 가라앉은 도로를 따라 서부 해안 이재민들이 줄을 지어 걸어왔다. 멍한 눈길로 수평선을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에서 얼마나 큰 공포를 겪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몬마타 마을에서 꼬박 이틀을 걸어왔다는 이스마일(43)씨는 아직도 아래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깐 쉬는 중에 지진이 일어났어요. 우리 집은 벽이 갈라졌을 뿐 지붕은 괜찮았어요. 지진이 지나가자 갑자기 바닷물이 1㎞ 정도 빠져나갔습니다. 해변에는 펄떡펄떡 뛰는 고기들이 많이 남았어요. 길이가 1c쯤 되는 큰 고기도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일단 고기부터 잡고 보자며 해변으로 뛰어갔습니다."
정신없이 고기를 줍고 있는데 갑자기 해일이 들이닥쳤다. 기릭 마을 출신의 알리(60)씨는 길이 약 15c 길이의 쓰러진 코코넛 야자나무를 가리키며 해일의 높이가 야자나무 높이의 2배 이상 되었다고 증언했다.
마침 생존한 주민 중에 실종된 은희천씨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삼술(26)씨는 "나이가 좀 드신 분이었는데 농담을 잘 해서 직원들이 많이 따랐다"고 회고했다. 이미 구조대가 다녀간 듯 10여구의 시신이 비닐에 포장된 채로 여기저기에 방치되어 있었다. 공장을 돌아보는 중에 해가 지고 곧 이어 칠흑 같은 어둠이 닥쳤다. 건물 내부에서는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 시신에서 나온 가스 때문인지 눈이 따끔거렸다. 우연히 만난 구조팀장 프레디 수트리스노(53)씨는 "생존자에 따르면 이 공장에서 근무한 600여명 중 20여명 만이 살아 남았다"고 전했다.
4일이 되자 반다 아체 시내에서는 구조 작업이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그동안 방치돼 있던 아체강 다리 아래 시신들을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수습했다. 시신들은 비닐 팩에 넣어져 트럭에 실려 매장지로 옮겨졌다. 곳곳에 급조한 매장지는 포크레인으로 땅을 깊게 파고 트럭에 실려온 시신들을 그대로 매장했다. 정확한 사망자 숫자를 파악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 박종우씨는 누구
박종우(46)씨는 1984년 한국일보 편집국 견습 41기로 입사, 11년 동안 사진기자로 활동한 전문 다큐멘터리 제작자이다. 기자시절에는 89년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오지 티베트를 취재, 보도하는 등 특종을 했다. 95년 다큐멘터리 제작에 전념하기 위해 퇴사한 뒤 오지·분쟁지역의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담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남아시아 지진해일 피해국 취재도 그 같은 작업의 일환이다. 현재 다큐 프로덕션 인디비전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작품으로는 ‘K2 등정 5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KBS 일요스페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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