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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본 ‘우리시대의 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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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본 ‘우리시대의 늙음’

입력
2005.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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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쳐들어오는 것이 세월이며, 세월이라는 채권자 앞에서 우리는 모두 금치산자에 불과하다."(김미현 해설 ‘웬 아임 올드’) 해가 바뀐 이 마당에 해찰궂게 노년 이야기 8편을 묶은 소설집이 나왔다. ‘소설, 노년을 말하다(황금가지 발행)’는 문학평론가 김윤식(서울대 명예교수) 씨의 명명처럼 ‘노인성 문학’ 의 범주 안에 드는, 노년(65세 이상)의 한승원 홍상화씨와 중·장년의 이순원 한정희 이청해씨, 30대의 하성란 이명랑 한수영씨가 각각의 세대적 시선으로 쓴 신작들을 묶은 책이다.

굳이 ‘고령화 사회’라는 분석사회학적 표현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인간은 시간을 계수화한 이래 해 바뀜과 함께 좋든 싫든 ‘나이’를 먹어왔고, 이성의 시간과 무관하게 ‘쳐들어오는 세월’로 노쇠하고 소멸했다. 따지자면 이 범주는 문화와 문학이 나뉘기 전 먼 시대, 생명의 유한성과 우주의 무한성에 대한 인지가 종교와 철학을 낳고 예술이 뭔지도 모른 채 예술 하던 시대 이래의 근원적 화두이지 않던가. 그것을 굳이, 이 시점에, ‘노인성 문학’이라 범주 둔 것은 늙음과 늙어감이라는 실존적 문제에 대한 보다 치열한 문학적 사유를 추어주고 촉구하기 위함일 것이다.

한승원씨는 ‘태양의 집’에서 ‘자궁(어머니)’을 박탈당한 손자와 그를 돌보는 늙은 동화작가의 이야기를 빌어 노년의 시간과 그 의미를 반추한다. 그것은 다 늙어 ‘태양의 집’이라는 당호를 다는, 그래서 태양의 생명력을 빌어 어린 손자의 박탈당한 자궁을 되돌려주려는 노년의 모습과, 수련(睡蓮)의 습생으로 환유되는 생의 순환을 말하고 있다. 한정희씨의 ‘산수유 열매’와 홍상화씨의 ‘동백꽃’은 노년의 열정과 그 원숙한 열정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의 이야기로 읽힌다.

이순원씨의 ‘거미의 집’은 노모 부양을 둘러싸고 벌이는 한 집안 형제들의 추한 다툼의 틈바구니에 끼어 "너무 오래 살았다"고 혼잣말 하는 노년의 이야기다. 작가는 너절한 논리로 서로에게 ‘짐’을 떠안기려는 자식들의 패륜에 대한 분노보다, 새끼들에게 제 몸을 내어주고 말라 죽어가는 거미의 처연함을 말하고 있다. 노년의 자식에 대한 헌신과 희생은 젊은 작가인 이명랑씨의 ‘엄마의 무릎’에서 더욱 직접적인 화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엄마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쩌면 엄마는 그저 세월에 뭉개진 무르팍이 문득 서러웠는지도 모른다." 늙음과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과 저항감을, 한수영씨는 노년의 주인공의 겪음을 통해(‘벽’), 이청해씨는 손자 세대의 살핌을 통해(‘웬 아임 식스티포’) 그리고 있다.

하성란씨는 ‘712호 환자’에서 맹장염 수술 도중 마취 실수로 21년간 식물인간으로 살다 깨어난, "어느 날 일어나보니 남자는 벌레가 아니라 노인으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 그는 5세 아이에서 26세 청년으로 자란 아이와 공유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는 ‘혼자’이자,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올드보이’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늙음의 과정은 정도의 차이일 뿐, ‘712호 환자’의 경험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일까. 과연 시간은 시침의 느림으로 정체를 은폐하지만, 시간의 다른 이름인 세월은 적군처럼, 안개처럼 쳐들어오는 것일까.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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