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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308> 카트린드메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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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308> 카트린드메디시스

입력
2005.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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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1월5일 프랑스 국왕 앙리2세의 비(妃) 카트린드메디시스가 70세로 죽었다. 그녀의 죽음은 프랑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과 맞먹었다. 이 외국인 출신 왕비의 영광과 오욕 속에서 프랑스 역사도 함께 요동쳤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메디치가(家) 출신으로 프랑스 왕비가 된 카트린드메디시스는 남편 앙리2세와의 사이에 자녀를 열이나 두었다. 그 가운데 아들 셋은 각각 프랑수아2세, 샤를9세, 앙리3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치세 동안 남편의 정부(情婦) 디안드푸아티에에게 밀려 천덕꾸러기 노릇을 했고, 장자인 프랑수아2세의 짧은 치세 동안에도 왕실 친척 기즈공(公)에게 밀려 권력을 누리지 못했다.

카트린드메디시스가 프랑스 최고권력자가 된 것은 차남 샤를9세의 즉위와 함께 섭정이 된 뒤다. 그녀의 나이 41세 때다. 그 뒤 카트린드메디시스는 신교에 기울어진 부르봉 왕가와 가톨릭에 기울어진 프랑스 최고 귀족가문 기즈가(家) 사이의 갈등을 때로는 조정하고 때로는 부채질하며 14년간 프랑스를 쥐락펴락했다. 3남 앙리3세가 즉위한 뒤 섭정을 사임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죽을 때까지 프랑스의 최고 어른이었다. 그녀의 치세 아래 벌어진 가장 끔찍한 사건은 성(聖)바르톨로메오의 학살(1572)일 것이다. 국왕과 가까운 위그노(신교도) 콜리니 장군의 암살 미수 사건을 얼버무리기 위해 기즈 집안과 카트린드메디시스가 선동한 이 난리통에 수천명의 신교도가 목숨을 잃었다.

탁월한 정략가 카트린드메디시스는 한편으로 문화애호가이기도 했다. 그녀는 파리에 루브르궁을 건축하고 튈르리 정원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공식 기록에 남아있는 역사상 최초의 발레 공연을 직접 하기도 했다. 1581년 10월15일 그녀가 몇몇 귀족들, 시종들과 함께 공연한 발레의 표제는 ‘왕비의 발레 코미크’였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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