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상승률을 밑도는 은행금리에 유동자금이 채권형 펀드로 몰려든다.’ 지난해 경제면 기사의 한 구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한국증시의 가장 극적인 순간의 하나로 꼽히는 1999~2000년 증시 호황기 직전의 경제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국제통화기금(IMF)의 고금리 처방에 따라 시중금리가 연 30%까지 치솟으며 실물경제가 급격히 위축되자, 정부는 98년 2월부터 저금리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99년에는 회사채 금리가 연평균 8.8%로 떨어지며, 사상 초유의 한자리수 금리시대가 도래했다. 투신사들은 외환위기 당시 보유하고 있던 고금리 회사채를 이용, 저금리 때문에 은행권을 빠져 나온 자금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 결과 97년 말 94조원이던 투신권 수탁고는 99년 6월 254조원으로 불어나 은행 예금(253조원)을 추월했다.
채권형 펀드에서 넘치는 돈은 자연스럽게 증시로 흘러 들었다. ‘강세장은 절망 속에서 싹튼다’라는 증시 격언처럼 98년 6월 16일 지수 277.37까지 곤두박질했던 증시는 차근차근 대세상승을 위한 여건을 갖추기 시작했다.
지수 300을 밑돌던 98년 10월부터 폭발적인 상승세가 시작돼, 불과 9개월 만인 99년 7월 7일 사상 세 번째로 지수 1,000을 돌파했다. 상승 초기 국면에서는 증권과 건설 등 저가 대중주가 먼저 움직였다. 98년 7월초 119원이던 한화증권 우선주는 연말 1만3,700원까지 115배나 치솟았다.
증시가 활기를 띠면서 99년 3월 ‘바이코리아 펀드’를 선보인 현대투신은 4개월 만에 10조원을 모았고, 여기에 ‘박현주 펀드’로 대표되는 뮤추얼펀드까지 가세해 본격적인 증시 간접투자 시대를 열었다.
당시 바이코리아 펀드를 운용했던 담당자는 "주식을 사도사도 끝이 없을 만큼 돈이 물밀 듯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이후 기관과 외국인의 저가 매수세가 결합된 이른바 ‘쌍끌이 장세’가 이어졌다. 실물경제는 외환위기를 거치며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저금리정책의 위력은 1년도 안돼 주식시장에 불을 댕긴 것이다.
올해 실물경제는 지난해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증시 전문가들이 지수 1,000 돌파를 자신하는 배경에는 98~99년의 데자뷔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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