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가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고 균형사회를 만들 수 있는 현실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왜 지금 중도가 필요한가, 중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그 한계와 과제는 무엇인가. 지난해 11월 중도를 내세우며 출범한 기독교 비정부기구 ‘기독교사회책임’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권영준 경희대 교수와 우리 사회의 중도세력에 대해 연구해온 김호기 연세대 교수의 대담을 통해 바람직한 중도의 길을 모색한다.
◆ 중도의 의미는 모두 아우르는 플러스 알파를 만드는 것
▦권영준= 중도나 중용은 자기를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의 가치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 진실을 찾아가므로 통합도 가능하고 합리적 대안도 제시할 수 있지요. 일반적으로 선진국에서는 하나의 이즘(ism)을 절대화하지 않고 합일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정을 봅시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이 나타나고 있지만 선진국에서는 국가 전체의 파이를 키워놓고 이득을 보는 계층이 손해 보는 계층을 도와주면서 조화를 이루지 않습니까.
▦김호기= 중도가 의미있으려면 플러스 알파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단순한 중간, 평균이 아니라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플러스 알파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서구사회에서 나타난 중도, 즉 ‘제3의 길’은 좌파 사회민주주의도 우파 신자유주의도 아닙니다. 시장의 활력과 함께 사회적 정의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었죠. 이런 노력과 흐름이 우리 사회에서는 취약했습니다.
▦권영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모두 중도가 아니라, 분야별로 보수적인 또는 진보적인 정책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경제 분야에서는 좀더 개혁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500만 절대빈곤층을 포함해 1,000만명 서민층을 시장논리에 맡겨서는 사회안전망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전체적 시너지효과를 내려면 팩트(사실) 중심의 실사구시정책을 펴나가야 합니다.
▦김호기= 우리 현실을 돌이켜 볼 때 중도주의에 바탕을 둔 정치적·사회적 상상력이 빈곤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일이겠지요.
광복 60주년이 되도록 중도는 해방공간에서 여운형 김규식이 추구한 좌우합작, 또 1950년대 후반 조봉암 노선 정도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 이후 본격적인 논의는 1997년 DJ정부 들어서야 나타났습니다. 역사적 경험에서 보수(산업화세력)와 진보(민주화세력)가 맞서 내려오는 과정에서 중도의 뚜렷한 흔적이 없습니다. 시민사회에서는 중도적 지향이 있지만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부족했던 게 현실입니다.
▦권영준= 해방공간 이후에 보수와 진보의 흐름에서 중도가 제대로 서지 못했던 이유는 물리적 힘에 의해서 좌우됐기 때문입니다. 군부는 총칼의 힘을, 민주세력은 사상의 힘을 내세우며 주도권을 잡으려 했지요. 소프트 파워인 대화를 통한 설득보다 힘에 의한 불행한 역사가 지배해왔습니다. 이제 한 사이클을 다 경험해봤지만 결과는 바닥까지 온 상태입니다.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가 지금처럼 보장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중도가 나서야 하고 또 필요한 때입니다.
◆ 선명한 정책대안과 차별화한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김호기= 우리 사회에서 중도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3의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반사이익만을 얻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복지정책이나 기업에 대해 선명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보수나 진보와 비교했을 때 차별화한 정책들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권영준= 중도는 단순히 양쪽보다 나은 길이라는 점만 강조한다면 실패합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새뮈얼슨이 지적했듯 환경, 지하경제 등을 지수화해서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지표를 기준으로 경쟁력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장과 분배정책을 볼 때에도 중도의 입장에서는 성장촉진용 재분배정책 또는 분배촉진용 성장정책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김호기= 중도 내부의 이념적 분화도 필요합니다. 예컨대 프랑스사회에서는 중도우파(드골연합)와 중도좌파(사회당) 사이에 이합집산과 토론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중도세력이 있는 것 같은데 이념적 분화는 이뤄지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중도가 어필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최근 뉴라이트가 신우파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체가 잡히지 않습니다. 우파의 혁신인지, 중도우파인지 애매합니다.
▦권영준= 분화도 중요하지만 반면에 연대도 매우 중요합니다. 메이저(큰 노선)에 동의하면서 마이너 부분을 타협하고 연대할 수 있는 그룹이 세력화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 우리사회는 낡은 보수와 낡은 진보가 판치는 상황
▦김호기= 시민사회에서 다수가 스스로 중도라고 생각한다면 입장을 대변하는 단체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분화 가능성은 있습니다. 한나라당은 정통보수와 중도보수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열린우리당은 중도진보로, 민주노동당은 정통진보로 자리잡지 않을까요. 현재 열린우리당은 중도적 포괄정당으로 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은 보수, 중도, 진보 3각구도 형세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런 구도가 오래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양당체제로 가든지, 보수와 진보의 색채에 따라 재조정돼 다수당이 연립하는 식으로 갈 것 같습니다.
순수보수든, 순수진보든 21세기에 살아 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합니다. 특히 여전히 박정희식 발전이 가능하다든가, 반공주의가 돌출하는 것은 정치적 후진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권영준= 산업화 민주화를 늦게 시작한 우리나라는 압축적으로 그 두 가지를 이루었지요. 21세기 지식정보화사회가 도래했지만 아직도 낡은 진보와 낡은 보수가 판치고 있습니다. 21세기형 진보 보수가 아니라 19세기에 머물고 있는 현실입니다. 때문에 중도는 일단 사회세력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국민의 지지를 받은 후 대안세력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 정치세력화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 언론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중립과 균형 지켜야
▦김호기= 중도가 경계해야 할 것은 산술적인 형식논리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안에 따라 양쪽 다 문제가 있다는 형식적 양비론보다는 어디에 문제가 더 큰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컨대 수구세력들이 들고 나오는 색깔론 같은 것은 마땅히 비판해야 합니다. 민주노동당 정책강령만 봐도 1960~70년대 서구의 사민당과 유사한데, 정치권 일부가 민주노동당을 좌경세력과 등치하는 것은 대화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우리 사회의 진보세력이 대화와 타협에 익숙하지 않고 상상력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보수 쪽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영준= 민주노동당은 권위주의시대의 환경적 역사적 산물로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일부 강령은 명확히 해주어야 합니다.
▦권영준= 중도가 자리를 잡는 데는 언론의 역할도 큽니다. 언론이 상업적 가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에는 공적 기능이 약해집니다. 소유권과 경영권을 인정한다 해도 소유권과 편집권이 한 몸이 돼서는 곤란합니다. 양 극단의 언론들이 사회통합을 방해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호기= 언론의 생명은 권력과 거리를 두는 것인데, 우리 언론은 자기 반대 정파와는 너무 멀고, 자기 정파와는 너무 가깝습니다. 균형감각 없이 한쪽으로 쏠려버린 느낌입니다. 언론이 권력의 대변자인 것처럼 활동하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권영준= 언론이 여론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을 장악하는 상황에서는 진정한 여론이 존재하지 못합니다. 중산층과 중도세력이 자리잡는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중립적이면서 권력중립적이어야 합니다.
▦김호기=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친 우리 사회는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해 정치사회집단들이 역사적 대타협을 해야 할 시점입니다. 현재 세계적 조건은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날 놀라운 발전을 이룬 네덜란드 덴마크 아일랜드 등은 새로운 도약의 시점에서 노동과 자본, 사회적 강자와 약자, 지역간 타협을 했습니다. 타협을 통해 도약의 에너지를 얻은 거지요. 광복 60주년을 맞는 올해 우리 사회에도 진정한 타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타협을 주도할 수 있는 이념과 세력이 중도입니다. 보수든 진보든 서로에게 조금 더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영준= 중도가 세력화하기 전까지는 대통령이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처럼 기득권층이 등을 돌리지 않게 하면서 스스로 베풀어주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회통합정책이고 국민통합입니다. 이를 위해 중도가 앞장서야 합니다.
정리=최진환기자 choi@hk.co.kr 사진 =류효진기자
■ 김호기 金皓起·45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교수
■ 권영준 權泳俊·53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학 박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상임집행위원장
▦경희대 국제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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