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출판계에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인문출판이 죽어간다는 소문이 빚어낸, 불길한 유령이다. 책동네 바깥에서는 과장 섞인 호들갑이 아니겠냐 싶겠지만, 사정을 아는 전문가들은 심각하게 우려할 상황이라는 데 뜻을 같이하고 있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냐고 개탄해도 소용없다. 내가 보기에 이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며, 대증적인 치료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출판의 위기는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개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를 간략하게 말하면, 세계자본주의가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윤리’에서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고진의 표현을 빌면, "욕구를 만족시킬 권리를 축적"하는 것의 가치는 부정되고, 지금 당장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만이 의미 있는 시대에 들어섰다.
인문학 도서 읽기는 그야말로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본에 충실하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성찰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위해 읽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언제 효과가 나타날지 기약할 수 없는 인문책을 읽느니, 당장 공부 잘 하고 부자 만들어준다는 실용서에 손길이 가고 있다.
이제 우리의 고민은, 시대정신에 일대 지각변동이 있으니 만큼, 인문서의 몰락을 당연시 여겨도 될 것인가에 있다. 나는 단호하게 아니다, 라고 말한다. 외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닫는, 이 광포한 자본주의를 인문정신이 견제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본다. 이 생각에 동의한다면, 사회적 차원에서 인문정신을 담는 그릇으로서 인문출판을 고사위기에서 건져낼 방책을 찾아야만 하리라.
나는 대학 교양교육의 강화가 인문출판의 회생을 이끌 강력한 대안이라 여기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학은 이른바 ‘맞춤교육’에 대한 강박증에 시달려 왔다. 산업현장의 요구에 맞는 실용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치바나 식으로 말하면, 한낱 하급지휘관을 키우는 일에 불과하다. 제너럴은 대장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장군이 되면 군 전체를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에 제너럴"이란다. 교양교육이야말로 폭 넓은, 그러니까 제너럴 지식을 배우는 바를 뜻한다.
물론, 교양교육의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강의 주제를 뚜렷이 정하고, 이에 대한 관련도서를 읽고 함께 토론하는 식의 수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추론을 만들고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때 비로소 책 읽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책을 읽게 될 것이고, 인문출판의 숨통이 트일 터이다.
얼마 전 출간된 하비 콕스의 ‘예수 하버드에 오다’는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윤리적 사유’라는 이름을 내걸고 시작한 하버드의 교양교육의 실상을 엿볼 수 있어서다. 인문학 위기는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유독 우리의 대응력은 취약하다. 대학이 책 읽는 곳으로 바뀔 때 우리 인문출판에도 ‘봄날’이 올 터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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