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ㆍ서남아를 덮친 쓰나미(지진해일)의 엄청난 파괴력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예측할 수 없는 위기의 실체를 새삼 일깨웠다. 지난해 말 예일대 캠퍼스에서 만난 역사학자 폴 케네디 교수는 "인류가 환경의 재앙과 인구증가, 급속한 기술발전과 금융의 혼란 등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위기를 겪을 것"이라며 국제적 협력이 위기 극복의 열쇠라고 강조했다. 쓰나미 발생을 며칠 앞두고 그로부터 들은 21세기 위기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초국가적 위험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1993년 출간된 저서 ‘21세기의 준비’에서 새로운 위기를 경고했다. 우리 시대의 위기는 세계 종말의 서곡인가, 아니면 새 질서를 위한 또 다른 도전인가.
"내가 그 책을 쓰고 있을 때 21세기에 대한 예측들, 특히 낙관론과 비관론의 차이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비관론자들은 한국일보 독자에게 이 끔찍한 인구와 환경의 재앙,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내전의 증거를 보라고 강조한다. 그들은 21세기가 위기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낙관론자들은 세계 경제 성장과 신기술, 가난에서 벗어나 중류 생활을 하고 있는 아시아 사람들, 강대국들이 상호 대화하는 모습과 국제재정시스템의 기능, 많은 사회가 세계화 대열에 참여하고 있는 흐름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밝고 낙관적이며 찬란한 21세기가 열릴 것이라고 역설한다."
-귀하의 견해는 어느 쪽인가.
"두 개의 극단적인 입장들이 너무 일반화돼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앞으로 경제 성장이 더 지속되고 가난에서 벗어나는 인구가 증가할 수 있다. 특히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재앙이 계속되고 생활 수준에서 큰 발전이 없을 것이다. 지구 온난화는 기후에 계속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빙산을 녹이고 바다의 수위를 높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식량 증산을 위한 신기술을 찾아낼 것 같다. 21세기에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혼재할 것이라는 얘기다. "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난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은 무엇인가.
"문제는 세계의 각국 정부가 좋은 소식이 될 것 같은 일들을 장려하고 나쁜 소식이 될 일들을 줄이기 위해 협력할 수 있느냐인데 그것은 베이징과 뉴 델리, 워싱턴과 모스크바, 브뤼셀의 정치가들에 달려있다. 그들은 대량살상무기뿐 아니라 지구 온난화 방지와 생태환경 개선, 인구통제 정책을 위한 국제적 재정 협력 등 다양한 방면에서 함께 일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특히 아프리카를 위한 특별한 원조가 절실하다. 이런 일들을 위해 국제적 조직과 메커니즘을 강화하고 더욱 활동적인 평화유지 및 경제발전 기구의 창설이 요구된다."
-강대국들과 다른 나라들 사이에 위기 대처 능력이 다를 텐데….
"중간 국가나 작은 국가 모두 그런 도전에 직면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이 강대국만큼 세계적 사건들에 그렇게 큰 양향을 미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중국이나 인도 미국과 러시아 일본이 세상 일에 미치는 영향력은 한국이나 말레이시아 이탈리아 스웨덴보다 훨씬 크다. 또 강대국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제약 받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과 같은 중간 국가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중간 국가들이 강대국에 비해 영향력에 제한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다른 국가들과 협력해야 하고 외교적 정치적인 해결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하고 있다. 그것이 캐나다와 스웨덴, 호주 같은 중간 국가가 중국이나 미국보다 훨씬 더 유엔을 지지하는 이유이고, 한국 정부가 베이징과 워싱턴 도쿄 공관에 보낼 전문 외교 인력을 훈련시키는 이유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게 양질의 언론이다. 한국인들은 또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양질의 신문들과 뉴스 프로그램을 필요로 하고 있다. 모든 나라가 세상을 각자의 관점에서만 보는 경향이 있다. 민주사회에서는 다른 국가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게 매우 중요하다. 당신이 만약 다른 국가들이 어떻게 문제를 보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통찰력을 갖고 이것이 중국과 우리의 차이점이구나라고 말하기 시작한다면 공통의 정책을 개발, 그런 차이를 메울 수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해보자."
-귀하의 표현대로라면 네 마리 코끼리 사이에 낀 작은 동물에 불과한 한국이 그런 외교력을 발회할 수 있겠는가.
"한국은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강대국 사이에 낀 중간 국가이기 때문에 미묘하고 외교적인 정치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스위스나 네덜란드 같은 유럽 국가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전문적인 외교 인력을 길러왔다. 또 그들은 국제적 압력을 잘 인식하면서 국민들에게 그들 국가가 중간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중간 국가라는 것을 인식시켜왔다. 한국이 가진 영향력은 다른 중간 크기의 많은 국가들과 결합될 수 있다."
-한국이 미국과의 견고한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에 다가서고자 한다면 어떤 전략적 선택이 요구되나.
"난 당신의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한국의 상황에 대해 훨씬 낙관적이다. 나는 한국이 중국과 통상적 관계뿐 아니라 정치적 관계도 증진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은 먼저 중국 정부에 한국이 한반도의 불안정을 원치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현재 상태는 좋다. 한국이 북한을 흡수하거나 재통합하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고 있다. 북한이 무너진다면 우리는 중국과 긴급하고 즉각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공격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지역의 변화의 인자는 아니다. 한국은 중국과 외교적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중국이 우리가 한반도에 미군을 주둔하고 있는 이유가 중국을 적대시해서가 아니라 북한의 광적 행동에 대한 안보 차원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건설이든 자동차 공장 건설이든 한중 공동 계획이 많아질수록 우리에게 좋다. 한국은 외교를 필요로 하고 그것이 도움이 되는 그런 나라이다. 이것이 나의 메시지다."
-한국은 지금 내부 갈등을 심하게 겪고 있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갈수록 더해지는 양상이다.
"나는 한국 정치 전문가는 아니지만 한국이 깊은 정치적 분열, 분노와 시위, 때로는 의회내의 싸움을 경험하고 있음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가 논쟁과 이견 속에서도 규칙을 지킨다면 민주주의 내에서 용인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후 60년이 흐르는 동안 한국은 총체적 갈등을 체험했으며 통제된 정치와 경제 상황이 이어졌다. 한국은 점진적으로 민주화했고 이제 교육 수준이 높은 젊은 세대, 보다 젊은 정치인들이 나타나고 있다. 변하게 마련이다. 모든 사회는 현대화와 신사고, 신세대로 인해 변하고 있다. 기성 엘리트들은 그들이 지닌 권력을 나눠 갖는 게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젊은 세대는 타협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소박한 견해로는 한국 정치의 최악은 서로를 적대시하고 정치적 긴장 국면을 조성하는 것이다. 한국의 국회의원이 서로에 반대하는 내전 상황에 빠지기에는 세계는 너무 복잡하고 위험하다. 그들은 한국이 정말로 심각한 내부의 분열에 빠질 여유가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고 신이여, 지금은 우리가 다툴 때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예일대 출신 2명이 서로 다른 이념을 갖고 이번 미 대선에서 경쟁했다. 미국의 보수주의가 대선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런 경향이 계속될 것으로 보는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이런 기조가 깊이 뿌리 박혀 있다. 특히 서부와 남부에선 원리주의적 기독교 교회의 무시무시한 조직력에서 그 힘이 나오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민주당보다 훨씬 더 유권자들을 조직화했다. 그들은 백악관에 보수적인 사회정책을 펴라는 압력을 넣을 자격이 있다고 믿고 있다. 동성애나 낙태 문제 등은 미국 밖에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미국의 원리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을 모으게 하는 명분이 된다. 그런 경향은 조지 W 부시 정부가 애국주의를 자극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그들은 전쟁의 와중에 현직 대통령에 반대표를 던지면 우리 군대를 배반하게 된다고 호소했다. 근본주의적 사회정책과 애국적 호소의 두 힘은 앞으로도 강력하게 남게 될 것이다. 엄청난 혼란이 있고 군사적 재앙이 온다면 반동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민주당의 진보적 지도자들이 백악관에 들어가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군사적 재앙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정말로 현 정부가 보다 온건한 정책을 취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한국인들도 그런 생각을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 위기’란
과거 제국의 흥망사에 매달려온 폴 케네디 교수는 ‘21세기의 위기’를 분석함으로써 미래의 역사를 투시하고자 했다. 그는 21세기 인류에게 닥칠 위기를 ‘전통적인 위기’와 ‘새로운 위기’로 대별했다. 전통적인 위기가 그가 ‘강대국의 흥망(1987년)’에서 다룬 군사력의 충돌, 즉 국가간 위기를 의미한다면 새로운 위기는 보다 잠재적 위험인 비군사적 요소를 지칭한다.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자연환경의 파괴, 경제의 세계화와 빈부격차, 기술정보 혁명과 세계 금융시장의 붕괴 가능성, 로보틱스와 생물공학. 그는 ‘21세기의 준비(1993년)’에서 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이런 비전통적 위협들이 어떻게 세계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그의 연구는 과연 인류가 그 자원의 범위를 넘어서는 재생산의 만성적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가에 대한 오랜 의문에 답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얻은 결론은 초국가적 힘의 작용을 앞에 두고 세계 각국은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그가 최근 유엔 연구에 천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폴 케네디 교수 약력
▦1945년 영국 출생
▦영국 뉴캐슬 대학 역사 전공, 옥스포드대 역사학 박사
▦1983년부터 미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재임. 예일대 국제안보연구프로그램 소장
▦영국로열아카데미 회원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강대국의 흥망’ ‘21세기의 준비’‘영국 해군 지배력의 흥망’ 등 저서 다수
뉴 헤이번(코네티컷주)=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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