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보·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
■ 가장 아름다운 말
우리 국민은 ‘사랑’(33.7%)과 ‘어머니’(8.2%)를 가장 아름다운 모국어로 생각한다. 신은 도처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한다. 신이 미처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없는 곳에서 대신 사랑을 베풀라고. 신의 편재성(偏在性)을 설명하는 서양의 격언은 사랑과 어머니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숭고성과 불멸성을 잘 말해준다.
10위안에 드는 나머지 말은 ‘행복’(7.4%), ‘고맙습니다’(3.2%), ‘예쁘다’(2.5%), ‘아름답다’(2.4%), ‘가족’(2.0%), ‘미리내’(1.6%), ‘우리’(1.4%), ‘건강하세요’(1.3%) 순이다. 대부분 개인과 사회에 온기를 불어넣는, 생명을 머금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은하수의 순 우리말인 ‘미리내’ 역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희망과 동경을 상징하는 단어다. 이 밖에 ‘노을’, ‘이슬’ ‘어울림’ 같은 말을 좋아하는 사람도 비교적 많았다. 여자응답자는 36.1%가 ‘사랑’을 꼽아 남자(31.2%)보다 다소 높았다. 특히 ‘아기’와 ‘하늘’이 ‘우리’와 ‘건강하세요’에 앞서 10위 권에 포진, ‘건강하세요’를 7위에 올린 남자와 대조를 이뤘다.
중졸이하는 ‘꽃’ ‘대한민국’ ‘반갑습니다’라는 말을 ‘가족’ ‘미리내’ ‘우리’보다 좋아했다. 대학재학 이상은 ‘하늘’과 ‘시나브로’를 선호, 그 바람에 ‘우리’와 ‘건강하세요’ 가 10위 밖으로 밀려났다.
지역에 따라서는 10위권을 장식하는 말이 다소 달랐다. 수도권에선 ‘시나브로’와 ‘금수강산’이 ‘예쁘다’ ‘건강하세요’를, 충청권에선 ‘아버지’와 ‘친구’가 ‘우리’ ‘미리내’를 제쳤다. 경상권의 경우 ‘아기’ ‘하늘’ ‘노을’이 들어간 반면 ‘시나브로’ ‘우리’ ‘건강하세요’가 빠졌고 전라권에선 ‘희망’이 ‘우리’를 대신했다.
■ 가장 듣기 싫은 말
말에 날이 서면 폭력이 되고 상대에 상처를 주게 마련이다. 우리 국민의 28.3%가 ‘욕(욕설)’을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로 꼽고 있다. 일상에서 그만큼 욕이 난무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욕’에 버금가는 10위권의 단어를 보면 ‘짜증난다’(5.8%), ‘재수없다’(5.3%), ‘싫다’(3.9%), ‘나쁘다’(3.2%), ‘미워한다’(2.5%), ‘너는 안돼’(2.1%), ‘바보’(2.0%), ‘꺼져’(1.9%), ‘싸가지’(1.9%)로 정리된다. 모두 귀에 익숙할 뿐 아니라 무심코 내뱉는 말이기도 하다.
남녀 모두 ‘욕(욕설)’을 가장 듣기 싫은 말의 첫 번째로 들었는데 남자는 응답자(493명)의 32.7%에 해당하는 161명, 여자는 응답자(507명)의 24.1%인 122명으로 집계됐다. 여자보다 남자들이 욕을 더욱 많이 하고 있다고 해석되는 결과다. 연령별 특징을 보면 20대는 ‘결혼해라’(10위), 30대는 ‘멍청하다’(8위)와 ‘가시나’(계집애의 사투리· 9위)라는 말을 10위 안에 포함시킬 정도로 꺼려했다. 40대에선 ‘죽겠다’(8위)와 ‘거짓말’(9위), 50대에서는 ‘나이들어 보인다’(5위)라는 말이 들어갔다.특히 젊은 층은 ‘결혼해라’는 말을 악의 없는 인사가 아니라 욕으로까지 받아들이고 있어 주목된다.
블루칼라층에선 ‘공부해라’, ‘나이들어 보인다’, ‘도둑’, ‘가난하다’ 등을 기피단어로 선택했다. 농·임·어업 종사자의 경우 ‘못났다’, 자영업층에선 ‘나이들어 보인다’, 화이트칼라층에선 ‘거짓말’, 주부들의 경우에는 ‘가시나’란 말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왔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따뜻하기가 솜과 같다. 사랑이 담긴 말이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영하는 조사 결과라고 풀이된다.
■ 2005 가장 듣고 싶은 말
새해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부자되세요/돈 많이 버세요’(19.4%)가 아니라 ‘건강하세요’(27.5%)인 것은 다소 의외다. 가장 널리 주고 받은 새해 덕담이 2003년에는 ‘대박 터뜨리세요’, 2002년에는 ‘부자되세요’라는 조사가 있는 걸 보면, 두 말이 각각 로또 열풍과 TV광고 카피의 영향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대다수 한국인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지난해는 외환위기 때보다 더하다는 불황이 아니었나.
덕담 인기어로 ‘건강하세요’가 부상한 것은 최근 몇 년 거셌던 부자 바람이 웰빙붐에 차츰 밀리는 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건강하세요’는 남자(26.4%)보다 여자(28.6%)가 더 듣고 싶어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부에 대한 열망이 줄어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응답자 1,000명 중 194명이 ‘부자되세요/돈 많이 버세요’를 제일 듣고 싶은 말로 고른데다 ‘경기가 좋아졌다’(5.3%), ‘하는 일 잘 되세요’(5.2%), ‘잘 살아라’(1.8%), ‘성공하세요’(1.5%) 등 10위권에 든 덕담의 절반이 돈벌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말이기 때문이다.
연령별로는 20, 30대가 ‘부자되세요/돈 많이 버세요’를 가장 듣고 싶은 말로 꼽은 데 비해 40대와 50대 이상은 ‘건강하세요’를 선호했다. 순위는 다르지만 모든 연령층에서 ‘건강하세요’, ‘부자되세요/돈 많이 버세요’, ‘행복하세요’가 다같이 3위권에 들었다. 특히 모든 지역에서 ‘건강하세요’와 ‘부자되세요/ 돈 많이 버세요’가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직업별로는 농·임·어업층과 가정주부, 학생, 무직·기타층에서는 ‘건강하세요’를, 자영업, 블루칼라, 화이트칼라층에서는 ‘부자되세요/ 돈 많이 버세요’를 선호했다.
■ 2004 가장 인상적인 말
지난 한해 가장 인상적인 말로 ‘탄핵’(11.6%), ‘욘사마’(8.1%), ‘웰빙’(7.3%) 등 중요한 사건이나 세태와 연관된 말이 꼽힌 것은 짐작할만한 일이다.
눈여겨 볼 것은 10위권 안에 TV 드라마나 코미디 프로그램, 광고에 등장한 말이 절반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언어생활에서 방송매체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다. 드라마 대사로는 ‘내 안에 너 있다’(‘파리의 연인’)가 5.6%로 4위를, 같은 드라마에 나온 ‘애기야’(4.8%)가 5위를 차지했다.
6위(4.7%)를 차지한 ‘아빠 힘 내세요’는 원래 1997년 MBC 창작동요제에서 입상한 동요제목이지만 이 노래가 한 카드회사 광고에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머리에 또렷이 각인됐다. ‘부자되세요’는 경기불황으로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 말로 볼 수도 있지만 사람들 입에 너나없이 오르내린 것은 카드회사 광고카피로 사용된 것이 결정적이다. 10위 권에 들지 못했지만 요즘 SBS 코미디 프로 ‘웃찾사’로 한창 유행하는 ‘그런거야’(2.2%), 역시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생뚱맞다’(1.4%)도 인상적인 말로 꼽혔다. 넓게 보면 ‘욘사마’ ‘웰빙’도 신문·방송 등 언론·광고매체들이 한류 열풍과 건강을 중시하는 사회풍조를 강조하기 위해 반복해서 사용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남녀별로는 남자가 ‘탄핵’(17.2%)을 인상적이었다고 답한 데 비해, 여자는 ‘웰빙’(8.7%)을 꼽아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 차이를 드러냈다. 모든 연령대에서 ‘탄핵’이 가장 인상적인 말이었지만, 40대에선 ‘웰빙’이 1위로 나타났다.
이기창 대기자 lkc@hk.co.kr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조사는 만 20세 이상의 성인 1,000명을 추출, 성비에 따라 남 493, 여 507명을 할당했다. 연령 분포는 20대 23.4, 30대 25.2, 40대 22.6, 50세이상 28.8%로 구성됐고 지역별로는 수도권에 가장 많은 47.5%를 배정한데 이어 경상권(27.5) 전라권(10.7) 충청권(10.3) 기타(4%) 순이었다. 직업분포는 가정주부(30.3) 화이트칼라(21.2) 자영업(16.7) 학생(10.6) 블루칼라(8.8) 무직·기타(8.1) 농·임·어업(4.3%), 학력은 대재이상(51.8) 고졸(30.9) 중졸이하(17.4) 등이다. 조사는 전화인터뷰로 이뤄졌으며 표본오차는 ±3.1%포인트(95% 신뢰도 수준)이다.
◆ 전문가 분석
■ 권재일 서울대 교수·언어학/"말은 우리 생각·삶을 이끌어 와"
말이 바로 생각이라 할 수는 없지만, 말과 생각은 매우 가까운 관계다. 생각을 말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말의 구조에 맞도록 조정해야 한다. 그래서 말의 구조는 그 말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의 틀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김만중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사람의 말과 마음은 같은 것의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말 속에 생각과 느낌이 담겨 있고, 생각과 느낌 속에 말이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어는 한국사람다운 정신을 길러 주는 가장 중요한 구실을 맡고 있다고 하겠다.
얼마 전 영국문화협회가 비영어권 100여 개 국가의 주민 4만 여 명을 대상으로 아름다운 영어 단어를 꼽으라고 했더니 ‘moth er’가 첫번째였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바로 어머니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럼 우리 말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고른다면 무엇이 될까?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은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이번 여론조사는 이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전체 응답자의 무려 33.7%가 ‘사랑’을 첫번째로 꼽았다. 이어서 ‘어머니’, ‘행복’, ‘고맙습니다’를 선택했다.
이것은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 바로 ‘사랑, 행복, 감사’, 그리고 ‘어머니’가 아름다움의 징표로 자리잡고, 우리의 말, 생각, 그리고 삶을 이끌어왔음을 보여 준다.
지난해 인상적인 말 중 ‘욘사마’와 ‘한류’가 문화적 산물이라면, ‘웰빙’(well-being)은 다분히 상업적 산물이다. ‘특수사육 웰빙 돼지고기 인기’, ‘술도 웰빙 바람 와인판매 급증’ 같이. 그럴 듯한 외국말로 포장해야 광고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새로운 개념을 우리말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새해에 ‘건강하세요, 부자되세요’라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우리들의 생각이, 건강하고 안정된 생활을 찾으려는 ‘참살이’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 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종교학/"관계단절 뜻하는 말 듣기 싫어해"
성, 연령, 지역, 직업, 학력의 모든 구분에 관계없이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로 압도적으로 ‘사랑’이 꼽힌 것을 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사랑은 전체 윤곽을 그리려 할 때는 모호하지만, 자신의 기억에 충실한다면 반대로 뚜렷한 이미지를 갖는 말이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말 속에서 아름다운 기억의 운동장을 꿈꾼다. 생명의 근원이자, 영원한 안식처의 일정한 이미지를 지닌 어머니보다 사람들이 사랑을 가장 아름다운 말로 꼽은 것은 사랑이 주는 상상력의 자유로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전면적으로 총체적인 상호소통의 느낌을 바라는 것’으로 사랑을 정의할 수 있다면, 사랑이라는 말은 그 범위 안에서 자유롭고 역동적으로 다종다양한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어머니라는 말이 포근함, 평온, 회귀의 안정적 이미지를 주는 데 비해, 사랑이라는 말은 종잡을 수 없이 움직이며, 자유로운 방황의 분위기를 포용하고 있다.
듣기 싫은 말을 관통하고 있는 성격은 관계의 단절 혹은 소통의 거부이다. 듣기 싫은 말은 우리들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자신이 남에게 짜증나는 존재, 또는 재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 그것이 두렵다. 명퇴의 세대에게는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것이, 그리고 다이어트 세대에게는 ‘뚱뚱하고, 살쪘다’는 것이 두렵다. 여성에게는 구태여 여성임을 강조하는 ‘가시나’라는 말이, 그리고 블루칼라에게는 ‘공부해라’와 ‘가난하다’라는 말이 두렵다.
‘2005년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누구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건강하세요’이다. 어떤 부귀영화도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몸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다. 적자생존 식 자본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돈에 대한 갈증은 처절할 수밖에 없다. ‘경기회복’, ‘행복’, ‘성공’, ‘소원성취’, ‘취업’ 등의 항목은 모두 돈 많이 버는 것으로 환원할 수 있다. 우리 욕망의 종착역은 바로 돈이다.
■ 정태석 전북대 교수·사회학/ "복잡한 문제보다 즐거움 추구"
아름다운 말, 듣고 싶은 말, 듣기 싫은 말, 인상에 남는 말처럼 말은 일상의 우여곡절을 품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에 압도적으로 ‘사랑’이 선택된 것은 말 자체도 아름답지만, ‘사랑’이 시대를 초월한 소중한 감정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름다운 말과 듣기 싫은 말이 시대상황에 덜 민감하다면, ‘2004년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이나 ‘2005년 새해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시대상황을 민감하게 반영한다. 사람들은 가장 인상적인 말로 ‘탄핵’, ‘욘사마’, ‘웰빙’ 등을 꼽았다. 그런데 여기에 성별 차이가 드러난다. 남성의 경우 정치적인 관심이 많아서인지 탄핵이 1위를 차지하는 반면에, 여성의 경우 주부들의 비중이 높아서인지 웰빙이 1위를 차지했고, 탄핵은 5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탄핵을 제외하면 경기불황, 행정수도 위헌, 이라크파병, 국가보안법, 실업대란, 불우이웃돕기, 병역비리, 국회파행 등 중요한 사회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다. 반면에 대중매체와 인터넷의 영향으로 ‘욘사마’, ‘내 안에 너 있다’, ‘애기야’, ‘아빠 힘내세요’, ‘부자 되세요’, ‘얼짱’, ‘몸짱’ 등 TV드라마나 코미디, 광고, 인터넷의 유행어들이 사람들의 인상에 더 깊게 남아있다. 사회 문제를 잊고 일상적인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웰빙에 대한 관심은 현대인의 생활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 큰 몫을 했다. 한 쪽에서는 비정규직, 실직, 빈곤으로 웰빙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삶의 질과 여유를 추구하는 양극화한 현실은 복지 없는 한국사회의 우울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새해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건강하세요’, ‘부자 되세요/ 돈 많이 버세요’ 등 건강과 민생에 관한 말들이다. 전망이 밝진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꿈꾸는 말이 현실이 되길 빌어본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