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을 체결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60년전엔 식민지로부터 해방됐으며, 40년전엔 한일 양국 정부가 협상을 통해 국교정상화를 이뤘다. 2005년은 양국간에 이런 역사들이 굵은 마디를 이루는 해이다.
양국은 그런 올해를 기념해 ‘한일 우정의 해’로 정했다. 그동안 양국관계에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국가간 이벤트라 할 수 있겠다.
국교정상화 당시 한해 1만명이던 양국간 왕래자는 2004년 400만명에 달했다. 하루 1만명을 넘는 숫자이다. 올해에는 500만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양국간의 놀라운 왕래자 숫자는 서로에 대한 의식의 변화와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한국의 일본문화 개방, 한일 공동 월드컵을 거쳐 일본에서 폭발한 한류(韓流) 붐은 ‘껄끄럽고 부담스런 나라’, ‘열등한 후진국’이던 한국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지금 국가 지도층이 돼 북한에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설득하는 격세지감을 목격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이 이처럼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된 것은 틀림없지만 어두운 과거 역사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한국의 친일진상규명법 제정과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의 협정문서 공개 움직임,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와 우익 역사교과서의 검정 재신청 등 2005년에도 양국간에는 과거사와 관련된 문제들이 잠복 중이다.
그러나 양국 정부는 이러한 문제들을 외교문제화하기보다는 각국의 국내 정치문제로 처리하겠다는 자세를 분명히 해왔다. 과거사를 둘러싸고 중일관계와 한일관계가 크게 달라진 점이다. 이로 인해 과거사 문제는 한일간 외교갈등의 주제라는 측면보다는 두 나라에서 각각 따로따로 첨예한 갈등을 유발하는 국내정치 사안으로 변질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양상은 자신은 과거사에 부담과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본의 전후세대, 일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해방 이후 세대가 각각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많다. 대신에 이들은 경험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내재된 감정적 내셔널리즘으로 쉽게 치닫는 경향을 공유하고 있기도 한다.
한일 관계 100년, 60년, 40년을 생각할 때 매 시기 배후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미국의 존재는 2005년에도 변함이 없다.
미국은 100년전 한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권익을 양해했고, 60년전 일본을 패망시켜 한국을 해방으로 이끌었으며, 40년전 냉전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관철시켰다. 지금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북일 국교정상화에서도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역시 미국이다.
6자회담, 북일 국교정상화, 주한미군·주일미군 재편 등의 문제에서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에 일본은 미일동맹 유지와 강화를, 한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최우선시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미래의 한일관계가 양국간 관계설정 보다도 양국과 미국의 관계 설정에서 더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무거운 전략적 과제도 많지만 2005년에는 3월 아이치(愛知)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한국 관광객에 대해 한시적 비자면제가 실시되고 김포-하네다(羽田) 직항편이 증설된다. 한일간의 교류와 왕래가 ‘국내 여행 감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양국간 자유무역협정(FTA) 교섭 타결 목표년도이다. 교섭이 예정대로 타결될지는 낙관하기 어렵지만 과거 식민지로 일본 자본주의 체제에 강제 편입됐던 한국이 자유의지로 일본과의 시장통합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역사의 엄청난 변천이다.
라종일(羅鍾一) 주일대사는 "과거사로 인해 ‘가깝고도 먼 나라’이던 양국은 월드컵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이웃’이 됐다. 또 상대 문화에 탐닉하는 열정을 통해 ‘함께 해왔던 과거’를 알게 됐고, 얽히고 설킨 지구촌시대를 살면서 ‘함께 가야만 하는 동반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 韓日관계 ‘키 넘버’
◆ 100년 을사조약/ 대한제국, 日식민지로 전락
1905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이 해 러일전쟁에서 승리, 한반도 식민지화의 마지막 걸림돌을 제거한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한일합방은 1910년에 이뤄졌지만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등을 골자로하는 이 조약의 체결로 한국은 이미 이름 뿐인 나라가 됐다.
당시 약소국 한국은 자신의 운명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국제정세에 무지했고, 열강들도 한국의 목소리를 철저히 무시했다. 러시아는 1904년 우리 몰래 북위39도선 분할안을 일본에 제시했고, 미국과 영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2차 영일동맹을 각각 맺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다. 을사조약은 고종이 서명을 거부하는 등 국제조약으로서 형식요건을 갖추지 않아 당시부터 무효라는 해석이 많았다. 을사조약의 정당성 문제는 일본이 간도를 중국에 할양한 1909년 간도협약의 유효성 문제와도 직결된다.
◆ 60년 광복/ 남북분단·전쟁의 씨앗 남겨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배를 끝내고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았다. 최근 식민지 근대화론도 제기되고 있으나 강제 징용·징병, 자원 수탈 등 혹독한 일제의 탄압으로 한민족은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일본에 대한 반감은 한민족의 ‘집단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독립은 한편으로 분단과 내전이라는 참극을 잉태했다. 치열한 독립 항쟁이 전개됐지만 우리 손으로 쟁취한 게 아니라 일본의 패망으로 얻어진 성격이 더 짙기 때문이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점령군으로 진주, 한민족의 운명은 이제 일본 대신 미소의 이해관계에 휘둘리게 됐다. 냉전 구도는 한반도에 고스란히 투영됐고 한반도는 냉전의 열전장이 됐다. 남과 북은 1948년 각각 친미, 친소 정부를 수립하며 분단의 길로 치달았고, 1950년엔 민족사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냉전기 분단·휴전 체제는 아직도 통일·평화체제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다.
◆ 40년 국교정상화/ 관계 재출발… 산업화 기여
해방된지 20년 만인 1965년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했다. 1951년 이후 국교 회복을 위한 한일 회담은 재개와 중단을 거듭하며 난항을 겪었지만 1961년 박정희 정권이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한국 일본과 각각 동맹을 맺은 미국이 양국을 채근했고, 박정희 정권도 경제 개발을 위한 ‘종잣돈’마련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2년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무장관이 소위 ‘김-오히라’메모를 교환했다. 한국이 순청구권 7억 달러에서 ‘10년간 무상원조 3억달러, 유상원조 2억달러’로 물러선다는 내용이었다. 독도 문제, 재일동포 지위 문제 등도 애매하게 넘어갔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비상계엄을 선포한뒤 1965년 2월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의 돈과 기술이 한국의 산업화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 국교정상화가 양국 관계 발전의 출발이 된 것도 사실이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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