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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희망이다/ 예술작품에 나타난 아름다운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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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희망이다/ 예술작품에 나타난 아름다운 가족이야기

입력
2005.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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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말했다.‘가족과 조국은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더 매력적’이라고.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상상되는 가족은 따뜻한 곳이다. 높은 산과 같은 아버지, 너른 평야 같은 어머니, 꽃과 새처럼 친근한 벗인 형제자매 들이 있는 곳이다. 세상에 상처 입어 쓰라릴 때 내가 찾아 들어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잘못을 덮어주고 칭찬과 격려로 꺾인 무릎을 일으켜 세워주는 곳이다. 우리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홈, 스위트 홈’은 마땅히 그런 모습이다. 밝고, 따뜻하고, 평화롭고, 안전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상상되는 조국은 가족과 같은 곳이다. 우리는 가끔 그들을 상상하며‘울컥’한다. 어머니가 없는 곳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우는 자식들이나, 조국을 떠나서 애국심을 느끼며 가슴을 떠는 사람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현실에서 시시각각 가족애와 애국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가족과 조국은 그것이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절박하게 필요성을 깨닫는 물이나 공기 같은 것이 아닐까?

누구도 가족의 가치를 부정하지 못한다. 가족을 거추장스런 ‘짐’이라거나 ‘구속’이라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등골이 빠져라 가족 전부를 먹여 살리는 일이 힘겹다고 말하는 아버지, 가족들을 챙기고 거두느라 자기를 잃어버리는 일이 끔찍하다고 말하는 어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리만족을 위해 그들의 귀여운 인형 노릇을 하는 일이 지겹다고 말하는 아이들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꽁꽁 감춰둔 검은 욕망들이 어느덧 비집고 나와 세상은 이미 서로를 견디기 버거운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이들로 가득하다.

그래서‘아름다운 가족’을 말하기에 앞서 가족의 불행을 말하는 일이 불가피하다. 세상이 말하는‘행복’이 지극히 천편일률적인 데 비해 ‘불행’은 너무도 다양하여,‘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보다는 가족의 갈등과 상처를 그린 작품들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세상의 눈으로 재단한 소위‘정상’가정보다는, 가족을 위협하는‘비정상’의 문제적 상황에서 가족의 가치와 의미가 오롯이 빛난다.

이른바‘가족 영화’로 꼽을 수 있는 것들에는‘집으로…’나‘아이 엠 샘’‘스텝맘’등이 있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등장인물 들은 하나같이‘비정상’적인 가정에 속해 있다. 독거 노인과 손자가 새 가족을 이루고, 장애를 가진 편부가 딸을 돌보며, 재혼 가정에서 친모와 계모가 뒤엉킨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통해 눈물을 흘리고 가족의 의미를 깨닫는다. 오히려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족들이‘조용한 가족’에서 엽기적인 공범으로 등장하거나,‘바람난 가족’에서 콩가루 집안의 진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부터가 비정상인가? 가족의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김원일의 소설집 ‘물방울 하나 떨어지면’에는 급변하는 한국사회에서 가족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고투가 사무치게 드러나 있다. 단편 ‘미화원’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마지막 숙제로 장애를 가진 아들을 돌본다.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아버지는 정신지체가 있는 아들을 버스터미널에 미화원으로 취직시키는 일에 힘을 쏟는다.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들에게도 냉혹하고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사회가 보호자 없는 장애인에게 관대할 리 없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사랑은 모질게 아들의 등을 떠밀어 직장으로 보내고 홀로 세상에 맞서도록 채찍질한다.

같은 책의 표제작 역시 장애인의 삶과 사랑을 소재로 한다. 하지만 이 중편의 초점은 장애인 아들을 위해 평생을 일하고 저축하여‘먹고 살 만큼’의 조건을 만든 부모보다는, 그의 동반자가 되고자 스스로 쉽지 않은 삶을 선택한 한 여성에게 맞춰진다. 그녀에게는 현실적인 선택이나 종교적인 신념을 뛰어넘는 가족애와 인류애가 있다. 단순히 한명의 장애인을 돌보는 간병인과 같은 배우자의 역할을 넘어서 가족을 잃고, 가족에게 상처 받고,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꿈을 꾼다. 가족의 불행을 숨기고 가족 내에서 해결하려 하기보다 세상 속에서 극복하려는 광의의 가족애가 사뭇 성스럽게 느껴진다.

노장들의 소설에서 가족의 갈등은 시간에 저항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처럼 화해되고 해결된다. 어쩌면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치열하게 싸우고 상처 입은 만큼 사유의 폭이 넓고 화해의 양상 또한 깊다. 박영한의 장편소설‘카르마’는 이십여 년 전 작가가 발표한‘첫사랑’의 수수께끼를 풀고 거대한 퍼즐의 마지막 한 쪽을 맞추는 느낌을 준다. 자전소설‘첫사랑’에서 주인공은 오로지 가족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기 만을 소원한다. 가난과 질병, 추악한 환경으로부터 탈출하여 세상 속에서 야망을 펼치며 운명에 복수하고자 했던 주인공은 어느덧 이순의 나이에 이르러 그 모두가 업(業), 인과응보이자 숙명의 인연임을 확인한다. 주인공은 더 이상 탈출을 꿈꾸던 지옥에서 만난 핏줄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외국문학에서 흔히 발견할 수 없는 한국문학의 독특한 가족주의는 우리의 불행한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국에서 십여 년을 거주한 어떤 서양인은, 자기 나라에서는 사회의 기본단위가‘개인’인데 비해 한국은‘가족’인 것 같다고 했다. 아직도 우리사회의 제1가치가‘가족’인 것은 사실이다. ‘가족의 위기’라든가‘가족 해체’‘가족 붕괴’등의 말이 역설적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사람들은 가족을 여전히 지키고 유지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가족이기주의는 쉽게 폄하할 수 없는 아픈 내력을 가지고 있다. 김원일의 같은 책에 수록된 제2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손풍금’은 한국사회의 독특한 가족주의를 예리하게 묘파하고 있다. 북에 고향을 둔 형제는 전쟁 이후 남쪽에서 만난다. 하지만 형은 생존을 위해 신앙과 생활을 선택했고, 아우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 오랜 감옥생활을 한다. 이처럼 이질적인 삶을 살게 된 형제이지만 서로를 질타하며 논쟁하는 대신 끝내 감싸고 용서하며 각자의 삶을 존중한다. 그들은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돕고 아껴야 한다고 강요 받거나 훈련된 적이 없다. 다만 가족에 의지해야만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가장 기동성 있게 움직여 포탄을 피하고 곡식을 구하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뿐이다. 가족이라는 처절한 피의 집단이 아니었다면, 지난한 역사와 삶의 투쟁 속에서 그 누구도 쉽게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고흐의 초기 대표작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함민복의 시‘눈물은 왜 짠가’가 떠오른다. 고흐는 고향 드렌테에 머무르던 시절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동생 테오에게 "몸소 일하면서 정직하게 식량을 구하는 사람들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식탁 주변의 인물들이 혈연의 가족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함께 노동하고 음식을 나눠먹는‘식구’다.‘눈물은 왜 짠가’에서, 중이염을 앓아 자신은 고기를 먹지 못하면서도 굳이 설렁탕 집에서 아들에게 고깃국물이나마 더 먹이려는 어머니 역시 평생을 고된 노동 속에 가난한 음식을 함께 나누며 살아온 식구다. 주인이 가져다준 국물을 섞어 다시 아들의 투가리에 부을 때 어머니와 아들의 그릇이‘툭’부딪히는 소리야말로 쓰러지지 말고 나아가 자기 몫의 생을 기꺼이 감당하라고 삶을 독려하는 사랑의 소리다. 그토록 누추하고 서러운 사랑이 세상 어디에 또 있는가. 오로지 서로를 닮은 못난 얼굴들에게만 베풀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랑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가족들은 대단히 화려하고 번듯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예술작품 속의 아름다운 가족들 역시 외양은 도리어 일그러진 흠집투성이다. 가난과 장애와 시대의 모순과 그 속의 갈등을 딛고 가까스로 서로를 보듬는 피투성이의 모습이다. 어쩌면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피에타 상처럼, 우리는 마땅히 사랑할 만 하기에 사랑하기보다는, 숱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상이 아닌 현실 속의 못나고 슬픈 가족들에게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것뿐이다. 피에타의 뜻이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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