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구제금융 시절보다 더 어려웠다는 2004년, 참으로 힘든 가정이 많았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포장마차 주인이 됐고, 어머니는 곁에서 우동국물을 끓였다. 대학생 아들은 군에 자원입대했고 딸은 휴학하고 패스트푸드점에 나갔다. 각자가 다 고단했지만 다함께 고생을 나누고 있어 누구도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2005년 새해 벽두, 가족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과 가정의 형태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가고 있지만 그 의미는 바뀔 수 없다. 가족은 어려울 때 더 빛이 난다. 역시 여러가지로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올 한해, 삶의 의욕을 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내 가족이 희망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이후 심재웅(57·경기 하남시 신장1동)씨는 가끔 옷속에 손을 넣어 배를 만져보는 버릇이 생겼다. 명치 아래 쇠꼬챙이처럼 길게 그어진 수술 자국. 잠시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들과 딸의 배에도 똑같이 나있을 상처가 자신의 것처럼 손끝에 감기는 것 같다. 지난해 7월 22일 장장 24시간 동안 서울아산병원 수술대 위에는 말기 간경변환자로 사경을 헤매던 심씨와 두 자녀가 함께 누웠다. 아들과 딸로부터 간을 이식받던 날, 그는 심연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보았다.
◆ 2003년 '가망 없음' 판정
심씨는 2003년 10월 병원에서 말기간경변으로 가망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청년시절부터 지병처럼 따라다녔던 간염이 간경화로 급진행한 것이다. 서울아산병원 이승규 박사로부터 "한 달을 넘기기 어렵다"는 소리를 들은 날, 심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막막하더군요. 군에서 제대한 뒤 아비 병수발에만 매달린 아들과 마냥 어려보이는 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파김치가 돼서 하루하루 버티는 아내 얼굴이 한꺼번에 떠오르더군요. 삼년째 간 기증자를 찾지 못했는데 이젠 정말 죽는구나 생각했죠."
가성혼수가 오기 시작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아무 의식이 없는 상태. 간 기능이 거의 정지하다시피하면서 분해되지 않은 암모니아 가스가 혈관을 타고 뇌로 올라가 뇌기능을 마비시키는 치명적 상태가 사나흘을 멀다하고 이어졌다.
"식당문을 닫고 옥탑방에 올라오면 컴컴한 마루에 남편 혼자 앉아 있었어요. 앉아서 자나보다 싶으면 눈은 뜨고 있는데 의식이 없는 거예요. 아들이 아버지를 냅다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죠. 관장하고 2~3일 혼수상태를 헤매다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와요. 기가 막히고 무서웠죠."
◆ 2004년 '어려운 결정'
부인 정경숙(50)씨는 지금도 수술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남편은 사경을 헤매는데 저는 용기가 없어서 무슨 결정을 못 하겠더라고요. 간 기증자는 없고 막상 있다 해도 1억원에 가까운 수술비는 어떻게 마련할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무력감. 그때 아들이 ‘엄마, 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니까, 시작합시다’라고 하더군요."
40평짜리 아파트는 투병생활 2년 만에 약값으로 날아갔고 월세 식당에 딸린 건물의 옥탑방에서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불경기에 식당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었지만 그렇다고 접을 수도 없었다. 망설이는 정씨를 설득해서 아들 영선(26)씨가 먼저 간이식 적합검사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실낱 같은 희망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부적합’ 판정. 영선씨의 간이 이식하기엔 너무 작다고 했다.
"네 식구가 붙잡고 앉아서 엉엉 울었습니다. 살면서 그렇게 많이 운 적이 없어요. 끝났구나, 이게 끝이구나. 이 아이들을, 평생 고생만 시킨 불쌍한 우리 식구를 어떻게 두고 가야 하나."
낮에는 식당일을 거들고 밤에 야간대학에 다니며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던 딸 주영(22)씨가 그때 나섰다. 어머니 정씨가 적합검사를 받으려 했지만 남매는 ‘엄마가 그나마 식당을 해서 먹고 사는데 안 된다’고 반대했다. 검사 결과 아들과 딸 두 사람이 동시에 간을 떼어줄 경우에는 이식수술이 가능하다는 판정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몇번밖에 이뤄지지 않은 드문 두 사람 동시 간이식수술이다. 수술날을 통보받던 날, 심씨는 살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아이들이 혹시라도 수술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 아들딸과 수술대에 눕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한 지 이제 5개월, 심씨는 자신의 몸이 건강한 간을 통해 7, 8년 이상은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아들 영선과 딸 주영씨도 건강하다. 수술 후 간이 원래 크기로 회복하려면 6개월은 요양해야 한다는 의사의 주의가 있었지만 영선씨는 새벽같이 일어나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돕고 아버지 심씨의 회복기 수발을 도맡아 한다. 제대 후 2년 여를 하루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이 안타까워 심씨가 "친구들하고 여행이라도 갔다 와라"고 떠밀지만 꼼짝도 안 한다.
"아버지는 천성이 부지런하고 꼼꼼해서 가만히 있지를 못 하시거든요.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는 쉬어야 하는데 자꾸 식당일을 하려고 하니까 제가 옆에 있으면서 감시하고 ‘야단’을 좀 쳐야 해요. 하하."
◆ 그래도 당신과 결혼해야죠
심씨는 아들딸의 간을 이식받았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인사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중엔 가슴 아픈 소리도 있었다. 맥주 한 잔도 못하는데도 인터넷에서 ‘얼마나 술을 퍼마셨으면 아들딸에게 간을 달래냐’ 는 글을 봤을 때는 식은땀이 흘렀다고 한다.
수술자국을 만져볼 때면 딸 생각에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나중에 비키니 입을 수 있게 돈 많이 벌어 성형수술시켜 주겠다고 하면 딸은 깔깔 웃기만 해요."
무엇보다 고마운 건 변함없는 아내였다. 경기도 오산시 동향 출신으로 스물 한 살 꽃다운 나이에 가진 거라곤 ‘부지런함’밖에 없는 28세 운전기사한테 시집 와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잘 버텨줬다. 인테리어업을 경영하면서 윤택했던 시절에는 참 행복했다.
심씨는 수술 후 애틋한 마음에 아내한테 "당신,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해 줘" 라고 말했다. 아내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절대 안 된다, 못한다"였다.
"무척 섭섭해 하더라고요. 하지만 나중에 식당일을 하면서 혼자 속으로 말했어요. ‘그래요, 그래도 당신과 다시 결혼해야겠죠’ 라고요." 아내 정씨의 말이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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