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은 한국 경제의 시련기였다. 대내적으로는 극심한 내수 부진으로 외환위기 못지 않은 불황을 경제 주체들이 감내해야 했다. ‘비상 경영’ ‘구조조정’ ‘최악의 취업난’ 등과 같은 용어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7년여 만에 재등장했다. 경제적 문제로 해체되는 가정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대외적으로는 중동지방의 불안정으로 인한 유가 급등, 환율 전쟁에 따른 원화 절상 등으로 수출 엔진마저 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고개를 들 정도였다. 앞으로 닥칠 한국 경제 모습은 더 비관적이다. 내수 침체, 원화 절상 등 악재는 해소되지 않은데다 한국 경제의 젖줄인 정보기술(IT) 경기의 둔화가 경제 회복에 제동을 걸 조짐이다. 한국일보는 50개 국내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 설문조사를 통해 금년도 경제 전망과 바람직한 정책 방향을 점검했다.
◆ 올해 경기, 얼마나 힘들어질까 = 금년 실물 경기가 지난해보다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관측에 모든 CEO들이 동의했다.
금년 성장률이 3%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64.0%)이 대세였다. 4%대 전망도 30%가 나왔지만, 3%대의 절반에 불과하다. 3%든, 4%든 잠재성장률(5% 내외)에 못 미치기는 마찬가지다. 국민경제적으로 요구되는 고용 규모를 유지할 수 없고, 성장잠재력도 훼손될 수 있다는 얘기다. 통상 성장률이 1% 떨어지면, 일자리가 10만개 줄어드는 것으로 분석된다.
경기 회복 시점을 묻는 질문에 ‘1·4분기’라는 응답은 하나도 없었고, ‘2·4분기’라는 답변도 8.2%에 불과했다. 금년 상반기는 모든 국민들이 뼈저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하반기부터는 경기가 다소 나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경기 회복 시점이 ‘3·4분기’(46.9%)와 ‘4·4분기’(24.5%)라는 응답이 ‘내년 이후’(20.4%)라는 답변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금년 성장률 전망이 3%대인 점을 고려하면, ‘아주 어려운 속에서, 그나마 좀 나아질 것’ 정도로 해석될 뿐이다. 중장기 전망을 묻는 질문에 47%가 "‘L’자형 장기불황에 접어들었다"고 대답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CEO들은 올해 우리경제를 옥죌 가장 큰 불안 요인(복수응답)으로 ‘소비 회복 부진’(35명)을 꼽았다. 지난해 우리 경제를 힘들게 했던 내수 부진이 올해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환율 하락’(21명), ‘정책 혼선과 리더십 부재’(20명) 등이 뒤를 이었다.
◆ 투자와 고용은 = 비관적인 경기 전망에서 보수적 경영은 불가피하지만, 기업의 투자와 고용이 살아나야 소비가 늘어나고 경기가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올해 투자는 작년보다 소폭 확대되는 선에서, 고용은 작년 수준에서 그칠 전망이다.
일단 기업들이 투자할 의지는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수익이 생기면 어디에 우선적으로 사용할 것인가’ 질문에 62.5%가 ‘투자’라고 답변했다. ‘현금비축 등 내부유보’(20.0%)나 ‘부채상환’(15.0%)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투자규모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소폭 확대’(47.0%)와 ‘작년 수준 동결’(45.0%)이 거의 비슷했다. ‘대폭 확대하겠다’는 응답은 6.0%에 불과했다. 투자의 필요성도 느끼고, 의사도 있지만 적극적 투자 확대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외국 자본에 대한 경영권 방어와 관련한 질문에 대해서는 68.0%가 ‘내국인 역차별을 막을 정도로는 규제를 고쳐줘야 한다’고 응답, 불투명한 경기 전망과 함께 경영권 위협이 적극적 경영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 전망도 투자와 거의 비슷했지만, 약간 더 비관적이었다. ‘작년 수준으로 동결하겠다’는 응답이 47.9%로 가장 많았고, ‘소폭 확대’가 45.8%였다. ‘동결’과 ‘소폭축소’(6.3%)를 합치면 54.2%가 작년보다 고용을 더 늘리지는 않겠다는 답변이다.
◆ 어떻게 풀어야 하나 = 해결의 열쇠는 정부가 쥐고 있다는 게 중론이었다. 정부 정책의 신뢰성부터 회복하고, 기업 규제를 완화해 투자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것이다. 경기 조기 회복을 위한 선결 과제를 묻는 질문에 ‘기업 규제 완화’라는 응답이 35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어 ‘재정 확대’(18명), ‘부동산 규제 완화’(15명), ‘가계 채무부담 완화’(15명) 등의 순이었다. 정부가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업이 정부 간섭을 받지 않고 투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올해 정부의 경제운용의 최우선 순위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같은 답변이 나왔다. ‘정부 정책의 신뢰성 회복’(29명)과 ‘기업 투자유인책 마련’(29명)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정부 정책을 믿을 수가 없다는 지적은 작년부터 제기돼 온 지적이다. 올해도 정부가 민간 경제계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정부의 경제정책이 시장에 먹혀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 현정부 성격은 "중립적" 53% "反기업적" 39%
현 정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중립적’이라는 응답과 ‘분배 중시 반기업적’이라는 대답이 각각 5대4 비율로 나왔다. 정권 출범초 친노동자·분배우선적 성격에 대한 기업인들의 의구심이 다소 해소되긴 했지만, 10명중 4명은 여전히 ‘왼쪽’에 치우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 정부의 정책 기조를 묻는 질문에 절반 정도가 ‘중립적’(53.0%)이라고 응답했지만, ‘분배중시 반기업적’이라는 대답도 38.8%에 달했다. 출범 초기인 2002년 8월 CEO 대상 본보 조사에서 77%가 ‘친노동자·반기업적’이라고 답했고, ‘중립적’이라는 응답이 16%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정부의 반기업적 색채는 크게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의 성격과 상관없이, 경제 운용에 있어서는 성장이든 분배든, 친기업이든 반기업이든 일관성 있는 정책을 보이지 못한 것이 최대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정부 경제 운용의 최대 문제점(복수응답)으로 ‘성장과 분배, 친기업과 반기업, 개혁과 부양 등에서 일관성과 방향성 부재’를 꼽은 CEO가 38명으로 가장 많았다. ‘반기업적 정책’이 최대 문제라고 응답한 사람은 5명에 불과했다. 지향점과 목표가 다른 정책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기업인들에게 불확실성을 심어주고, 불안감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 설문참여 CEO (가나다순)
▦강정원 국민은행장
▦구본준 LG필립스LCD 부회장
▦구학서 신세계 사장
▦김남권 동원금융지주 사장
▦김대중 두산중공업 사장
▦김병균 대한투자신탁증권 사장
▦김순환 동부화재 사장
▦김승유 하나은행장
▦김신배 SKT 사장
▦김쌍수 LG전자 부회장
▦김 인 삼성SDS 사장
▦김일태 위니아만도 사장
▦김지완 현대증권 사장
▦김충훈 대우일렉트로닉스 사장
▦남중수 KTF 사장
▦노기호 LG화학 사장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
▦닉 라일리 GM대우차 사장
▦박세흠 대우건설 사장
▦박일환 삼보컴퓨터 사장
▦손복조 대우증권 사장
▦송문섭 팬택앤큐리텔 사장
▦신상훈 신한은행장
▦신은철 대한생명 사장
▦신창제 교보생명 회장
▦신헌철 SK(주) 사장
▦오강현 한국가스공사 사장
▦유관홍 현대중공업 사장
▦윤창번 하나로텔레콤 사장
▦이구택 포스코 회장
▦이상운 ㈜효성 사장
▦이용경 KT 사장
▦이용구 대림건설 사장
▦이응복 ㈜이천일아울렛 부회장
▦이인원 롯데쇼핑 사장
▦이종희 대한항공 사장
▦장흥순 터보테크 사장
▦전경두 동국제강 사장
▦정만원 SK네트웍스 사장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
▦조충환 한국타이어 사장
▦최재국 현대차 사장
▦최준근 한국HP 사장
▦최휘영 NHN 국내부문 대표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
▦허원준 한화석유화학 사장
▦한준호 한전 사장
▦허동수 LG칼텍스정유 회장
▦황영기 우리은행장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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