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계의 오랜 숙원인 ‘호주제 폐지’가 2007년 실현될 전망이다.
정부가 제출한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중 개정법안’이 12월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유림을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있지만 열린우리당 의원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의원까지 호주제 폐지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한 국민 과반수가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고 있다. 1974년 호주제 폐지 문제가 국회에서 거론된 이래 30년이 넘어서야 매듭을 짓게 된 것이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우리 생활은 어떻게 변하게 될지 미리 살펴본다.
1. 남편과 사별후 아들 데리고 재혼했는데…
- 아들에 새 아빠 姓 줄 수 있어
올해 35세의 김모(여)씨는 28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젖먹이 어린 아들과 7년 동안 안 해본 일 없이 닥치는 대로 하며 힘겹게 살아왔다.
다행히 아이가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고 열심히 산 덕분에 내년쯤이면 작은 옷 가게 하나는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지난해에는 착한 남자를 만나 꿈에도 그리던 가정도 새롭게 꾸리게 됐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던 '행복'이라는 단어가 눈앞에 성큼 다가섰다.
하지만 그 동안 호주제 때문에 마음 고생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무너져내린다. 아들녀석과 남편이 이마를 맞대고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하다가도 둘이 친부자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류로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저미는 듯 아팠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호주제가 폐지돼 이제 두 다리를 뻗고 잠잘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무조건 친아버지의 성(姓)과 본(本)을 따라야 했으나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 현재 남편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2. 사내라곤 남편 외도로 얻은 아들뿐…
- 남편死後 호주 넘겨줄 일 없어
54세의 장모(여)씨는 30대 후반부터 20여년 동안 화병을 앓았다. 평생 남편의 외도와 폭력에 시달렸고, 시댁 식구들은 아무 쓸모도 없는 딸만 줄줄이 넷을 나았다며 노골적인 구박도 서슴지 않았다.
남편은 외도로 얻은 아들을 자신의 동의도 없이 자기 멋대로 호적에 올려버렸다. 만약 호주제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간암으로 남편이 죽은 뒤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7세짜리 사내아이가 자신과 딸아이들의 법적 보호자가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호주는 남성을 우선으로 하고 남자가 없을 경우에만 여성이 승계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씨는 비록 낳지도 않은 자식이 자신의 자식으로 등재되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다.
3. 미혼모로 키운 자식 옛 남자가 뺏으려…
- 아버지 家에 강제 입적하지 못해
32세의 정모(여)씨는 24세에 미혼모가 돼 9세짜리 사내아이를 기르고 있다. 대학교 같은 과 동기와 사랑에 빠져 동거를 시작했으나 시가쪽의 극심한 반대로 결혼에 이르지 못했다.
헤어진 뒤에야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정씨는 혼자 아이를 낳아 자신에 호적에 올렸다. 그러다가 2년 전 자신의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친아버지가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올려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아이를 빼앗길까 봐 노심초사해야 했다. 호주제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9년을 고이 키운 아들은 두 손 놓고 빼앗길 뻔했다.
호주제가 폐지되기 전에는 자녀는 아버지가 외국인이 아닌 이상 아버지의 가(家)에 입적하는 것이 강제 사항이었다. 따라서 아버지가 원하면 어머니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호적에 입적해야 했으나, 이제는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는 법원의 허가를 받아 기존의 성과 본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4. 외동딸 아내 집안 대 끊긴다는데…
- 아들에 어머니 姓 줄 수 있어
아들만 셋인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강모씨는 얼마 전 낳은 아들의 출생신고를 하면서 아내의 성인 박씨를 이어받도록 했다. 외동딸인 아내를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서도 오랜 생각을 한 끝에 이에 동의했다.
예전에는 무조건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고 입적해야 했지만 민법이 개정되면서 혼인신고시 합의한 경우에는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항상 대가 끊겼다며 안타까워하시던 장인은 강씨의 손을 잡고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5. 가장 체면에 직장도 잃고…
- 남성 ‘가부장’ 부담감 줄어들어
45세의 황모씨는 얼마 전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3학년의 두 아들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아내와 함께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보자고 다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남성들에게도 실질적인 이득이 돌아왔다.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가부장제도에서 남성은 오로지 능력으로만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가정을 부양할 능력이 없어진 아버지는 곧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호주제가 폐지되고 가장의 개념이 모호해지면서 남성들은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질 수 있게 되었다. 일부 여성계에서는 호주제 폐지가 여성에게 짐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며 불만을 토로하지만 남성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 호주제 폐지 Q & A
●호주제 폐지되면 신분등록은 어떻게 하나?
여성부는 지난해 실시한 호적 대안 연구결과 ‘개인별 신분제’를 가장 바람직한 대안으로 채택해 이를 법무부에 통보했다. 법무부 역시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와 공시기능 유지라는 측면을 모두 고려해 ‘개인별 신분제’를 최선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호주제 폐지가 결정되면 2년의 유예기간 동안 새로운 신분공시제도 도입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여론수렴 과정을 거칠 계획이다.
●호주제 폐지되면 가족해체가 우려되지 않을까?
호주제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호주제를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조차 1948년 이를 폐지했다. 호주제?폐지되면 그 동안 민법상 가족에 포함되지 않던 차남이나 혼인한 딸까지 신분등록부에 등재되므로 오히려 가족간의 유대관계가 돈독해질 수 있다.
●남매끼리도 성이 달라져 근친혼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혼 부부라 하더라도 신분등록부에 생부 및 생모가 기록되므로 근친혼에 이를 가능성은 없다. 현재도 이종· 외종·고종사촌은 성이 달라 근친혼이 발생할 개연성은 있다.
●상속이나 연금수혜 혜택에 혼란이 없을까?
현행법상으로도 상속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법정상속과 피상속인의 의사에 따라 이뤄지므로 호주제가 폐지되더라도 상속 서열에 혼란이 생길 우려는 없다. 또 종중재산의 유지와 관리에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각종 연금도 관련법에서 정한 자격에 기초하여 받게 되므로 호주제 폐지와는 무관하다.
●호적이 없어지면 족보도 사라지지 않나?
호적은 국민 개개인의 신분사항을 증명하는 국가의 공문서이고 족보는 문중의 가계(家系)를 기록하는 사적인 기록부이므로, 호주제가 폐지돼도 족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호주제가 폐지되면 새로 호적편제의 기준과 범위를 정하는 새로운 신분등록제도를 만들 수 있다.
●성(姓)을 바꿀 수 있게 하면 어머니 혼인 횟수에 따라 성이 바뀌게 되지 않을까?
부성을 원칙으로 하되, 자녀의 복리를 위해 부, 모 또는 자의 청구에 의하여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은 경우만 자녀의 성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만큼 성이 수시로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권대익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