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하미연(43)씨는 독신주의자다. 대기업 마케팅부서에서 근무하다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에 염증을 느껴 30대 초반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MBA(경영학석사)를 따고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시장동향 분석가로 활동 중이다. 성공한 전문직 종사자답게 꽤 괜찮은 중매가 들어오기도 하지만 마흔을 넘기면서 마음을 접었다. "40세 때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도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하려니까 내가 경제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남자 없으면 못 사는 여자도 아니고 뭐가 궁해서 결혼이라는 지옥으로 걸어들어가나 싶더라고요.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평생 고생하며 화병을 안고 살았던 어머니나 남편 수발에 직장에 육아에 정신없는 후배들 보면서 ‘그래 혼자 속 편하게 살자’ 싶었지요."
◆ #2
패션홍보회사에 다니는 전형선(31)씨는 전형적인 딩크(DINK·Double Income No Kids)족이다. 네 살 연상인 남편과 3년 전 결혼하면서 아이를 갖지않기로 약속했다. 부부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책임감과 부담감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다는 데 공감했다. "남편과 내가 서로를 보살펴가며 직장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겁다고 생각했어요. 사회적 성공도 중요하고 인생도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아이가 생기면 그 모든걸 잃게 될까봐 두려웠거든요. 결혼했다고 꼭 아이를 낳으라는 법은 없잖아요. 아이를 가질지 말지는 선택의 문제인데 저희는 전통적인 의미의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었고 선택하지 않은 것뿐이지요."
가족의 형태가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대가족사회가 핵가족으로 빠르게 대체된 것이 20세기 말의 사회적 현상이었다면, 21세기 첫 10년의 반을 넘긴 2005년 한국사회는 가족 형태의 ‘빅뱅 시대’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씨와 같은 독신가족은 물론 전씨 부부처럼 맞벌이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아이를 갖지 않는 딩크족, 입양가족, 국제결혼가족, 재혼가족, 한부모 가족 등 다양한 가족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내용 측면에서도 가족의 분화는 빠르다. 여성이 남성보다 나이가 많은 연상연하 커플, 남매나 동료처럼 부부도 성적 교류 없이 서로를 지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섹스리스(sexless) 부부, 직장 때문에 혹은 서로의 편리를 위해 따로 거주하는 분거가족이나 교육문제로 인한 기러기가족 등 핵가족이라는 단어로는 미처 설명되지 않는 독특한 형태의 가족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이런 달라진 가족 형태와 내용은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가족문제 및 사회적 인식, 관련 법률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한다.
재혼가정의 자녀들이 고통받는 성 문제는 호주제 폐지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대표적인 문제다. 지난해 결혼한 5쌍 중 1쌍은 최소한 부부 중 한 사람이 재혼이다. 통계청의 2003년 결혼·이혼 통계에 따르면 전체 혼인 건수 30만 4,900건 중 한 사람 이상이 재혼인 비율이 22.3%나 된다. 재혼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재혼 남자와 초혼 여자 커플은 3.8%, 초혼 남자와 재혼 여자 커플은 5.6%이며 양쪽 다 재혼인 커플도 11.6%였다.
급증하고 있는 독신가족은 가부장제에 기초한 전통적 가족 개념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말해준다. 부정적 이미지의 미혼(未婚)이 아닌 이혼과 사별을 포함하며 당당한 홀로서기를 주장하는 비혼(非婚), 곧 싱글족의 증가는 수치만으로도 놀랍다. 5년마다 조사하는 통계청의 전국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2000년 우리나라 1인 가구는 222만여 가구로 전체의 15.5%에 달했다. 이 가운데 미혼 가구는 43.5%를 차지한다. 2020년에는 1인 가구가 389만여 가구로 전체의 21%를 차지할 것으로 추산된다.
독신 선호는 여성에게서 훨씬 뚜렷하게 나타난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는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비율이 남성은 16.3%였으나 여성은 37.9%로 2배 이상 높게 나왔다. 결혼을 자발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는 미혼 남성은 30.4%였지만 여성은 51.8%에 달했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사회진출 증가, 가부장적 가족문화에 대한 반발이 원인으로 꼽혔다.
혈통주의, 순혈주의를 중시하는 한국의 가족문화를 흔드는 가장 큰 변화는 국제결혼의 증가세에서 두드러진다. 통계청 조사는 지난해 탄생한 부부 100쌍 중 8쌍이 국제결혼 커플이었다고 밝힌다. 남성 1만 9,214명, 여성 6,444명 등 모두 2만 5,658명이 외국인과 결혼했다. 2002년 1만 5,913명이 국제결혼을 한 것과 비교해 보면 무려 62%가 증가한 것이다.
국제결혼의 급증 요인으로는 두 가지가 꼽힌다. 첫번째는 국제화시대의 도래, 두번째는 뿌리깊은 남아선호 사상으로 성비 불균형이 심각해지면서 농촌과 저소득층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있는 신부감 수입 현상이다.
가족문제 전문가들은 갈수록 떨어지는 출산율과 이혼율 급증 등 가족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가족형태에 맞는 가족의 개념 정립은 물론 가족관련 법률이 재정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올해부터 여성부를 여성가족부로 개편하고 가족정책의 근간이 될 건강가정기본법을 주관토록 한 것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 제도·사회적 뒷받침 아직 제자리 걸음
한국 사회에서 가족형태의 분화는 눈부실 정도이지만 이런 다양한 가족형태를 지원하는 제도나 사회적 인식은 아직도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한부모가족이다. 한부모가족은 결손가정이라는 느낌이 강한 편모, 편부가족이라는 말 대신 쓰이기 시작한 용어로 사별이나 이혼 또는 고의적 유기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나 아버지, 또 미혼모 비혼모 가족이 이에 속한다.
2000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 한부모가족은 9.4%에 달했다. 열 가족 중 한 가족은 한부모가족인 셈인데 아직 우리 사회는 어머니 아버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을 ‘정상가족’으로 보고 그렇지 않으면 다 비정상 가족으로 보는 편견이 뿌리깊다. 이런 편견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한부모가족의 아이를 지나치게 동정적으로 보거나 잠재적 문제아로 보는 부정적 시각으로 드러나 결국 상처를 주게 된다.
재혼가족의 문제는 호주제라는 막강한 부계 혈통주의 가족제도의 위력 앞에 가장 심각한 피해를 받는 경우다. 아이가 취학연령이 되어 아버지와 성이 틀리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재혼가족은 피를 말리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비정상적이라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딩크족이나 독신가족도 마찬가지다. 딩크족은 흔히 이기적이라고 질타당하고 독신여성은 가족을 해체하는 존재로 폄하된다.
입양가족의 문제는 법적인 지원책이 시급한 형편이다. 민간단체들이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국내입양을 적극 장려하고 있지만 1958년부터 2003년까지 국내 입양된 어린이수는 6만 4,505명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해외입양된 어린이수는 20만명을 헤아린다. 국내입양을 늘리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혈통주의와 입양에 대한 인식을 바꿔줄 국가차원의 홍보교육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양육비와 의료비 지원 등 현실적인 제도보완이 절실하다. 국내에서는 어린이가 시설에 있을 경우 양육비 교육비 의료비 등을 정부가 지원하지만 입양되는 순간부터 모든 부담은 고스란히 입양부모에게 넘어간다. 입양할 때 입양부모가 내는 250만원 정도의 수수료는 세금혜택조차 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