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보급률 1위 국가, 세계 2위 휴대폰 제조국, 인터넷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종주국…. 정보기술(IT) 분야에서 한국의 위상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화려하다. 전 세계가 디지털산업 국가로 변모한 한국을 ‘IT 강국’이라고 일컫는 것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높은 해외기술 의존도, 국내시장에 안주하는 인터넷·소프트웨어 산업, 시대에 뒤떨어진 IT 마인드와 기술정책 등 성과보다는 고쳐야 할 허점이 많은게 현실이다. 한국 IT산업의 문제점과 한국이 진정 IT 강국으로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인지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한국은 정보기술(IT)의 백화점이다."
지난 9월 ‘IT 기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IBM의 한 고위 임원이 방한했다. 그 임원은 방한 기간중 한국의 IT 시장을 구석구석 둘러본 뒤 첨단 IT 기술이 한국에 총집결해 있는 상황을 보곤 한국 시장을 ‘IT 백화점’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세계 정보통신 산업의 동향을 알려면 한국을 살펴봐야 한다"며 "한국은 첨단 IT기술의 실험장(테스트 베드·Test bed)"이라고 말했다.
◆ 실패하면 버려지는 ‘기술 실험장’= 국내 최대 IT 기업인 삼성전자의 현황을 보면 그의 이 같은 말이 더욱 실감난다. 삼성전자는 2004년 12월 현재 무려 16개 기술에 걸쳐 150여종의 이동통신 단말기를 연구·개발하고 있다.
동기식ㆍ비동기식ㆍ유럽식 3세대 이동통신에서부터 세계 최초로 국내에서 시도되고 있는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DMB)과 한국형 휴대인터넷 와이브로(WiBro) 장비 및 단말기 기술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2004년 한 해 동안 이동통신 기술 개발에 투자한 비용만 해도 1조6,000억원에, 연인원 6,000여명이 투입됐다.
세계 2위의 휴대폰 제조업체인 삼성전자의 전략은 ‘다양한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을 선점, 높은 수익을 누린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특히 이동통신 분야에서 한국이 첨단 테스트 베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연구 투자의 범위가 더욱 다양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수익에는 반드시 높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거액을 투자한 차세대 기술이 국제적 표준이 되지 못하면 사장될 수 밖에 없으며, 잘못된 기술 투자와 그로 인해 초래되는 손실은 기업과 산업의 생존에 매우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일본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독자적으로 개발한 이동통신 기술인 간이휴대전화(PHS·Personal Handy System)의 경우, 국제 표준으로 자리잡지 못하면서 일본의 통신장비 및 단말기 산업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2001년 5월부터 우리 정부와 이동통신 사업자가 300억원을 투자해 개발한 무선인터넷 플랫폼(위피·WIPI) 역시 국제 표준화에 실패, 국내용 기술로 전락했다. 이동통신 업계 관계자는 "국내 사업자들이 위피를 채택, 제대로 활성화할 수 있을 지 여부도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 외국 IT 기업에게는 ‘기회의 땅’= 반면 원천 기술을 보유한 외국 IT 기업은 우리 기업과 입장이 다르다. 한국 시장은 외국 기업이 큰 부담 없이 자사의 신기술을 평가해 보기에 딱 알맞은 규모다. 더구나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기술 산업 육성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 미국 등 강대국 정부로서는 자국 기업 기술의 채택을 위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도 크다.
우리나라가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은 1990년대 초반 미국 정부의 입김 아래 도입이 결정됐다. 당시 원천기술을 보유한 미국 퀄컴사는 CDMA 서비스 장비나 단말기 기술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출신의 한 벤처 기업가는 "CDMA를 상용화한 것은 ETRI"라며 "1989년부터 1996년까지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781억원의 연구비가 투입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휴대폰 제조업체들은 퀄컴사로부터 CDMA 칩셋을 2004년 한 해에만 6억 달러(6,600억원)어치 이상 구매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또 국내외에 수출하고 있는 CDMA 휴대폰 단가의 5.25~5.75%를 퀄컴사에 따로 로열티로 지불하고 있는데, 그 누적액수가 2조원에 이른다. 반면 ETRI가 2004년 상반기까지 퀄컴사로부터 받은 기술료는 2,100억원에 불과하다. 원천 기술이 없는 테스트 베드 시장의 비운인 셈이다.
그래도 CDMA의 득실을 따지면 얻은 것이 더 많다. 오늘날 50개 이상의 국가와 113개의 이동통신 사업자, 1억3,000만명의 소비자가 CDMA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CDMA 관련 제품 수출로 벌어들이는 액수도 연간 9조원이 넘는다. CDMA는 유럽방식(GSM) 중심의 해외 기업으로부터 국내 이동통신 시장을 지켜준 ‘기술적 담장’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 빠른 기술 개발, 거대 시장 확보가 중요 = CDMA 사례는 테스트 베드 시장에 속한 산업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전략에 대해 여러 시사점을 남기고 있다. 즉, 원천기술의 유무를 떠나 정부와 산업계가 기술 개발을 주도, 표준을 빨리 정립하는 것이 성공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현재 정부는 와이브로와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DMB)을 ‘제2의 CDMA’로 제안한 상태다. 와이브로의 경우 2005년까지 총 390억원의 연구비를 투자해 늦어도 2006년께는 상용화할 예정으로, 기업들의 참여와 산업 활성화를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도 만만치 않다. 업계 관계자는 "CDMA의 경우 거대한 미국 시장의 힘을 얻어 국제적 표준으로 거듭나는데 성공했다"며 "하지만 와이브로나 우리 DMB 기술의 해외 시장 개척은 이제 시작 단계"라고 지적했다.
또 이들 신기술의 국산화를 무리하게 추진, 기술 표준화 시점이 자꾸 늦춰지면서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와이브로의 경우 현재 플라리온, 넷버스트, 브로드스톰, 어레이콤 등 외국의 10여개 업체들이 개발한 경쟁 기술과 ‘해외 시장 선점’이라는 생존 과제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한다. 이중 4~5개 기술은 이미 단말기와 서비스 장비 개발까지 마치고 시험서비스 단계에 도달해 와이브로보다 2~3년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홍진 플라리온 아시아태평양 지역 사장은 "와이브로는 기술 사양은 경쟁 기술들보다 뛰어나다"며 "그러나 외국보다 기술 개발이 늦어져 시장 선점 기회를 잃게 된다면 차라리 외국 기술을 도입해 일찍 상용화 하는 것 보다 못한 결과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 와이브로의 정치학
우리 정보기술(IT) 산업이 원천기술 없는 테스트베드 시장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기술적 우위만으로는 세계 시장을 선점할 수 없다.
한국형 휴대인터넷 ‘와이브로’(WiBro)가 정부 구상대로 차세대 성장동력이 되기 위해서는국제기구를 통한 표준 경쟁, 해외업체와의 제휴, 업체간 분업 등 정치적 전략이 필요하다.
정보통신부와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TTA)는 와이브로 기술이 국제 표준이 될 수 있도록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을 상대로 홍보전을 펴고 있다. 그 결과 최근 ITU 보고서에 ‘와이브로’‘휴대인터넷’(Portable Internet)이라는 용어가 종종 등장, 와이브로의 표준 채택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ITU는 2006년초 휴대인터넷 관련 표준 획정을 마칠 예정인데, 현재 미국전기전자기술협회(IEEE)의 무선인터넷 기술 표준인 802.16과 802.20에 호환되는 기술들이 경합하고 있다. 와이브로를 포함하는 802.16은 기존의 무선랜 서비스(802.12)보다 이동 수신 능력이 뛰어나 휴대인터넷의 근간 기술이 된다. 미국 인텔과의 전략적 관계도 와이브로 성공의 주요 변수다. 인텔은 최근 802.16에 근간한 와이맥스(WiMax) 무선인터넷 기술을 내놓고 국제표준화를 추진 중인데, 한국 정부 및 IT업계와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경쟁 관계인 와이브로와의 공생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와이브로와 와이맥스간 호환성을 확보해 궁극적으로는 한국에서 와이맥스 서비스를 실현하려는 의도로, 한국을 테스트 베드로 삼아 와이맥스의 세계 시장 진출을 이루려는 것이다. 우리 정부 역시 인텔과의 협력을 통한 와이브로의 세계 진출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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