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정문 앞. 대로를 따라 좌우측 옛 민주당사와 한나라당사 앞에 동서로 늘어선 500c 정도 인도에는 각종 대형 천막들이 경쟁하듯 마주보며 들어차 있다. 지난달 초부터 20여 곳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장기 농성을 계획하며 천막을 세우기 시작해 1개월여 만에 39개의 천막을 만들었다. ‘농성의 메카’다. 폭 5~6c의 인도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바람에 시민들은 농성천막을 피해 차도와 인도를 오가며 곡예보행을 해야 한다. 몇 대의 경찰버스와 전경들이 곳곳에 늘어서 있다. 우리 사회의 현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현장이다.30일 국회 정문을 나서니 가장 먼저 감옥을 본떠 만든 조그만 천막과 맞닥뜨렸다.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송현섭 정책위원장의 단식농성장이다. 두 달째 농성 중인 그의 천막에는 ‘주의, 오래된 단식으로 기력이 극도로 쇠진했으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문을 열지 마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었고, 천막 입구엔 빈 링거병들이 놓여 있다. 이어 ‘4대 개혁법안 통과’를 지지하는 진보단체들이 설치한 30여 곳의 천막이 줄지어 있다. 맞은편 인도에는 ‘국가보안법 사수 및 4대 개혁법안 반대’를 주장하는 보수단체들의 천막이 맞불 놓듯 늘어서 있다.
이곳 천막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600~800명. 천막 하나에 10~20명이 상주하고 있다. 이들 이외에 여의도 공원쪽에도 20여개의 농성천막이 설치돼 있어 합치면 1,000명을 넘는다.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아침 해를 맞이하며 하루 농성을 시작한다. 그리고 해가 저물 때까지 각종 방법을 동원, 자기 주장을 알린다.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기 위해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진보진영 김모(32)씨의 말.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하고 오전 시위를 시작합니다. 대개 출근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구호를 통해 우리 주장을 펴는 것이지요. 낮 12시께 점심식사를 위해 이동 중인 시민들에게 같은 방식의 시위를 하고, 오후에는 인근 빌딩가를 돌며 개별적인 시위를 합니다. PC방에 들러 사이버 선전전에도 가담합니다. 어떤 단체는 자전거에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적힌 깃발을 단 채 부근을 돌아다니기도 하지요."
길 건너편에 있는 보수단체들의 주장과 요구사항은 이들과 정반대지만 농성 방법은 비슷하다. 이들은 오전에 천막 안에 펴 놓은 대형 태극기 앞에 모여 국민의례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연다. 다음에는 단체로 구호를 외치고 행인들에게 유인물을 건네주며, 순번을 정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에 나서기도 한다.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뉜 농성천막을 지나다 보면 30여명의 사람들이 들어찬 대형 천막을 만나게 된다. 과거사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단체들의 농성장이다. 한국전쟁 때 어머니와 할머니, 남동생을 잃었다는 서영선(67·여)씨는 "농성을 시작한 지 2개월이나 됐는데 아무도 찾아보지 않는다"며 씁쓸해 했다. 이들 뒤편의 천막에서는 성매매 특별법을 반대하는 업계 종사자 10여명이 앉은 채로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또 다른 천막에는 ‘이라크 파병반대’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장애인 권익보장과 외국계 병원 허가반대를 주장하는 단체들의 천막에는 몇 명이 지친 듯 잠을 청하고 있다. 쌀개방 반대 농민단체, 전국공무원노조 등의 천막에는 올들어 언론매체를 대문짝만하게 장식했던 눈에 익은 깃발과 플래카드가 어지러이 걸려 있다.
농성천막을 지탱하는 기둥에는 ‘12월25일까지 자진퇴거하지 않으면 고발조치와 함께 강제철거를 하겠다"는 서울 영등포구청장 명의의 스티커가 붙어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 철거를 희망하는 이들은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부디 내년에는 구청에 의해 철거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기분 좋게 천막을 걷고 집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의 심정이고, 또 국민의 바람이다.
전성철기자 for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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