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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서울, 2004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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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서울, 2004년 겨울

입력
2004.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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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그 때도 지금처럼 추웠다.‘거리는 영화에서 본 식민지의 거리처럼 춥고 한산했고, 전봇대에 붙은 약 광고판 속에서는 이쁜 여자가 춥지만 할 수 있느냐는 듯한 미소를 띠우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완전히 얼어붙은 길 위에는 거지가 돌덩이처럼 여기저기 엎드려 있었고, 그 돌덩이 앞을 사람들은 힘껏 웅크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 서울 밤거리에 나타난 어느 포장마차 안에 익명의 세 남자가 우연히 함께 자리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말단 공무원이 돼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는 스물 다섯 살의 청년 김과 동갑내기인 대학원생 안, 그리고 ‘서적 월부판매 외교원’에 지나지 않는 서른 여섯 살의 가난뱅이 사내. 1965년에 발표한 김승옥의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은 세 남자의 한없이 쓸쓸하고, 춥고, 답답하고 절망적인 겨울나기와 서울의 풍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은 ‘하숙방에 들어앉아서 벽이나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안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을 느끼기’위해, 사내는 급성뇌막염으로 죽은 아내의 시체를 4,000원에 병원에 팔고 나서 밤거리로 나섰다. 그들은 꿈틀거림과 나만이 알고있는 아주 하찮은 것들, 슬픔을 이야기하지만 대화는 서로 섞이지 못한다. 그 해는 여전히 가난했고,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사회는 들끓었고, 비상계엄은 겨울 추위를 더욱 재촉했고 ‘벽으로 나누어진 (여관)방’보다 거리를 더 좁게 느끼도록 했다.

거리로 나섰지만 그들은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결국 셋은 각자의 (여관)방에 들고, 밤 사이 사내는 자살하고, 남은 둘은 새벽에 도망치듯 거리로 나온다. 그리고 둘이서 나눈 마지막 대화. ‘김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 다섯 살 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두 그건 분명합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그 뭔가가,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그들이 두려운 것은 군사독재의 군화가 내지르는 무자비한 폭력이었을 것이다. 그 폭력에 옴짝달싹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은 것, 한치 양보 없이 날을 시퍼렇게 세운 싸움, 서울 하늘 아래 함께 살면서 서로 섞일 수 없는 인간단절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사내의 자살은 빛이 없는 세상을 버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두려움과 한줄기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세상은 인간을 늙게 하고, 죽게 만든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400년전도, 채만식의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의 1930년대도 그랬다. 그리고 서울 2004년 겨울도.

40년 후의 서울은 여전히 춥고, 100통의 원서를 내고도 취직에 실패한 스물 다섯 살 청년은 애늙은이가 됐고, 가난을 이기지 못한 사내는 지하철 통로에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다. 직장을 잃은 후, 불과 몇 달 사이에 노인처럼 구부정해진 30대 후반의 한 사내는 이렇게 말했다. "할 일이 없다는 것,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의 의미를 아십니까. 그건 죽음입니다."

‘청년실업’이 올해 대학생들이 뽑은 최고 이슈가 된 사회, 눈앞의 이익만 노리는 외국자본의 ‘식민지’가 된 경제, 당파싸움에 죽어나는 것은 백성임을 알고도 싸움질을 멈출 줄 모르는 정치, 언어의 폭력을 휘두르는 일부 언론. 희망 없는 ‘서울, 2004년 겨울’은 이렇게 우리를 늙게 만들고 있다.

이대현 문화부장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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