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면 예외없이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방송가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더 우울한 것은, 한 해를 마무리할 지금조차도 끊임없이 ‘다사다난’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12월이야말로 2004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방송위원회는 21일 경인방송의 재허가 추천을 거부했다. 1980년 언론통폐합 이후 처음으로 방송사가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언론재단의 이사장 선임을 둘러싼 논란도 현재진행형이다. 언론재단은 방송저널리즘과 관련된 많은 사업을 해온 기관이다. 시청자들이야 피부로 느끼기 어렵겠지만, 방송인들에게는 이 역시 우울한 일이다. 방송관계법안의 처리여부도 해를 넘길 공산이 짙다. 안개만이 드리울 뿐, 내년을 위한 밑그림을 그릴 청사진은 없다. 이 와중에 경제상황의 악화는 광고한파로 이어져 방송사들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각종 연예대상의 3사 통합운영 요구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는 듯하다. 시청자들은 올해 세밑도 여전히 자기네들끼리 상 주며 좋아하는 모습을 채널마다 3시간씩 봐야 한다. 참 우울한 연말 방송가다.
원인을 하나하나 따지자면 끝이 없겠지만, 마냥 정부나 경제 탓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나라 방송사들은 어떤 자세로 스스로를, 또 내일을 바라보는가? 경인방송은 개국 초기에 게임중계, VJ 시스템 도입 등 참신한 시도로 기존 방송사들을 자극했고, 100% 자체 편성을 유지하며 바람직한 지역방송사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세 위축의 시작이었던 케이블TV 재송신불허에 대한 전략적 대처는 보이지 않았다. 최근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도 경영진은 진지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노조는 지배주주의 지분일부를 공익재단에 넘기라는 현실성 적은 주장을 고집하다가 정작 회사 문을 닫으라는 결정에 대해서는 박수를 쳤다. 방송사나 노조나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선임이나 방송관련법에 관한 논의의 장에도 정치만 있을 뿐, 시청자는 없었다. 늘 그래왔듯, 정부나 정치권이 정해주면 거기 맞춰서 운영하겠다는 식의 대응은 거대 방송사답지 않다. 한발 앞서서 진짜 시청자를 위한 ‘액션’을 취해야 시청자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을텐데 말이다. 방송사들이 풀 죽은 공룡처럼 생동감이 없어 보인다는 탄식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재정 악화라는 현실에 이르면 방송사들의 무대책은 정점에 이른다. 치솟는 스타의 몸값은 모르쇠 하면서 제작비 절감은 곧 프로그램의 질적 하락이라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방송사의 직원 대우는 항상 최고 수준이다. KBS가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언론학자의 45%가 수신료 인상의 전제조건으로 ‘구조조정 및 경영효율화’를 꼽았다. 그러나 같은 조건을 최우선으로 꼽은 KBS 직원은 10% 미만이었다.
이틀이 지나면 2005년 새해가 시작된다. 추위가 가고 따뜻한 봄이 오면, 하나 둘씩 매듭이 풀려나가 방송가에도 웃음이 생기기를 기대한다. 이 기대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방송사들의 자성과 환골탈태이다. 아듀, 우울했던 2004년.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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