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이다. 2004년을 떠나보내는 시간, 한국일보가 창간 50주년 기획으로 등장시켰던 지난 반세기 ‘우리시대 주인공들’과도 작별하고자 한다.소설로, 영화로, 노래로, 만화로, 드라마로 만났던 그들 혹은 우리의 자화상. 몇몇은 세상을 떠났다. 남은 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상상도 해보았다.
낡은 사진첩을 뒤적이며, 회한어린 추억에만 젖지 말자. 그들은 과거형이 아니므로. 모든 기억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고, 비록 흐릿해질망정 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그리하여 우리시대 주인공은 지금, 여기, 당신, 바로 우리들인 것을. 갓난아기부터 노인까지, 잘 났건 못 났건, 당신이, 우리가.
영화 ‘박하사탕’의 영호는 "나 다시 돌아갈래" 라고 울부짖었다. 그건 불가능한 꿈이었을까. 그는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돌아섬으로써 영원히 떠났다.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에 쓰라린 상처로 남아있다. 첫사랑에 들떠 있던 순진한 청년 영호. 1980년 광주, 진압군이 되어 한 소녀를 죽인 두려운 기억은 그의 영혼을 뭉개버렸다. 독하게 눈 딱 감고 살아보려고 했다. 버티기 위해 스스로를 마비시켜가며 악을 썼다. 한때 재미도 봤다. 하지만 끝내 쓰러지고 만다. 모든 것을 잃고 나이 마흔에 죽음을 택하기까지 영호가 걸었던 길은 곧 우리시대의 상처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무자비한 역사에 짓밟혀 숨죽여 우는 영호들을.
최인훈 소설 ‘광장’의 이명준도 옹이로 박혀있다. 휴전 직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 인도행 배를 타고 가다가 마카오 근처 바다에 몸을 던졌다. 세상 많이 달라졌다지만, 분단은 언제 끝날지 모르고, 색깔논쟁이 수시로 환생하는 나라. 그의 넋은 아직도 광장을 찾아 헤매고 있지 않을까. 그가 돌아올 광장을 만드는 건 우리의 숙제다.
역사에 치인 또 다른 주인공에 드라마 ‘모래시계’의 태수가 있다. 빨치산의 자식으로 태어나 음지에서 자란 깡패.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려면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독재정권에 돈을 대는 더러운 자본의 하수인이 되었다. 조직폭력배로 살다가 죽음을 맞는 그의 짧은 생애에는 1980년대 군부독재와 광주민주화운동, 생지옥 같았던 삼청교육대가 굵은 줄을 긋고 간다.
역사? 신념? 권력? 정의? 그런 건 모른다, 그저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가족들과 지낼 따스한 방 한 칸만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한 이들도 힘겨웠다.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김불이 가족은 70년대 도시재개발과 산업화의 희생양이다. 난쟁이에다 철거지역의 빈민인 그에게 희망은 너무 멀어 만질 수 없었다. 희망의 싹처럼 보였던 장남은 탐욕스런 자본가를 죽이고 사형수가 되었다. 그로부터 30년, 달의 토지를 분양하고 우주주민증을 발급하는 신종사업이 화제라는데 김불이의 후손들은 몸을 눕힐 방 한 칸에 목을 맨다. 빈부격차는 더 벌어져서 가난의 대물림이 숙명처럼 굳어간다.
‘난장이…’가 100쇄를 돌파한 1996년, 작가 조세희는 이 소설이 더 이상 읽힐 필요가 없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날이 언제일까. "우리 동네는 산동네이다. 아저씨들이 우리가 살 곳을 부수고 있다. 우리집이 폭삭 부서지는 생각을 하니 좀 두렵다. 왜냐하면 조금 재수없는 생각이지만, 떠돌이 생활을 할까봐이다. 아빠는 새 집을 사려고 저금을 하고 있으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부자들이 집을 사가지고 그 집값보다 훨씬 비싸게 판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나쁜 사람이다. 내가 다음에 부자 돼서 집을 많이 사서 그 절반 값으로 사람들에게 팔 거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의 글, 부스러기사랑나눔회 2004년 6월 소식지에서)
해 우리 나이로 마흔 둘. 소설 ‘외딴방’의 나, 연극 ‘칠수와 만수’에서 만수보다 한 살 아래인 칠수, 드라마 ‘서울의 달’의 홍식은 1963년생 동갑내기다. ‘외딴방’의 나는 유신말기인 78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구로공단 노동자가 된다. 다닥다닥 붙은 벌집 외딴방에서 힘들고 서러워 울던 나는 고된 공장생활을 하면서 산업체 특별학급을 나오고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나 간판쟁이 칠수와 사기꾼 홍식에게 꿈은 꿈으로 끝났다. 수치와 가난, 아픔 뿐인 세상에 복수를 다짐하던 홍식은 깡패의 칼을 맞고 죽었다. 칠수는 고층빌딩 옥상에서 세상을 향해 고래고래 욕을 하다가 시위자로 오인되어 경찰과 대치하다 추락했다.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칠수 만수 홍식의 불행이 그들이 쏟아냈던 증오와 욕설에도 불구하고 안쓰러운 것은 거기에 지금도 우리의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외딴방’의 시간보다 10년쯤 전 가난한 딸들에 봉순 언니가 있다. 1960년대 고달픈 식모살이로 가족을 먹여 살리던 숱한 봉순 언니들. 그들의 억척스러움이 곡절 많은 지난 반세기를 버텨 오늘에 이른 힘이 되었을 터이다. 하지만, 소설 속 봉순 언니 팔자는 기박하다. 여러 남자에게 버림 받고도 쉰이 다 된 나이에 다시 새 남자를 따라 나선, 그녀는 지금 행복해졌을까.
우리시대 주인공들의 삶은 왜 이리 상처 투성이인가. 소설과 영화 ‘별들의 고향’(1974년)의 가련한 여자 경아, 만화 ‘비둘기 합창’(1978년)의 너무 일찍 철이 든 개구쟁이 독고 탁,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1983년)의 슬픈 영웅 까치…. 권력을 대리해 횡포를 부리다가 끈 떨어지자 몰락해버린 ‘완장’(1981년)의 임종술이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년)의 엄석대 같은 소설 속 주인공조차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납작 엎드려 살 수밖에 없었던 비루하고 부끄러운 과거가 켕겨서는 아닐까.
런가 하면 오직 자식밖에 모르는 영화 ‘마부’(1961년)의 홀아비 하춘삼,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는 ‘맨발의 청춘’(1964년)의 서두수, 영악한 세상에 거꾸로 모자라서 순수했던 드라마 ‘여로’(1972년)의 바보 영구는 우리에게 그리운 표상으로 남아있다.
이 모든 주인공들의 기쁨과 슬픔, 분노와 좌절은 그대로 우리의 거울이다. 그들과 더불어 울고 웃으며 반세기를 통과했다. 더러 외면하고 싶거나, 못견디게 쓰라리거나,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들. 그들의 형질과 그들의 역사를 물려받고 공유한 당신, 아니 우리야말로 바로 이 시대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당신과 우리는 내일로 간다. 다시 새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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