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포도농가는 자유무역협정(FTA)에 가장 먼저 노출됐다. 한국-칠레 FTA 체결로 향후 10년간 과수농가 피해가 5,860억원에 이를 것으로 농림부가 전망한 가운데, 시설포도 피해액만 2,286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농촌경제연구원의 올해초 여론조사 결과 국내 소비자의 76.3%가 맛과 품질이 좋다면 칠레산 포도를 구매하겠다고 응답했다.그러나 경쟁력이 있다면 길은 있다.
경기 안산시 대부동동(대부도)의 포도 재배농가가 모여 설립한 그린영농조합. 이곳은 개방의 바람을 오히려 역풍으로 만들고 있다. 국내 최고의 포도주 제조업체로, 나아가 우리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와인 본고장으로 역수출할 꿈에 부풀어있다.
대부도는 풍부한 일조량과 적당한 해풍으로 포도 당도가 높아 옛부터 명산지로 이름났던 곳이다. 당도가 최고 19브릭스(brix·물 100g에 녹아있는 당분의 양)까지 나와 국내 평균 14∼16브릭스보다 상당히 높다.
하지만 아무리 고품질의 포도를 생산하더라도 판로나 가격이 형성되지 않으면 헛농사다. 그린영농조합 50여 가구는 포도의 안정적 판로 확보를 위해 포도주 제조회사를 직접 차리기로 했다. 2000년 4억원의 융자를 받고, 4억원은 공동출자해 포도주 가공공장을 설립했다.
시작은 초라했다. 공장 면적이라고 해야 100여평, 1,000리터 탱크 10개가 고작이었다. 탱크도 프랑스 독일에 견학 가 보고 들은 대로 만들어 시행착오도 겪었다.
하지만 이들은 철저한 준비를 하고 시작했다. 많은 국내 농촌의 조합업체들이 시설비만 융자받고 막상 운영자금은 감당하지 못해 1∼2년 내 무너지곤 하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충분한 자금을 준비했다. 지속적인 투자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4∼5년내 배당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조합원들을 설득했다.
한국와인연구소 하형태 소장을 기술고문으로 초빙해 ‘그랑 꼬또’란 제품을 만들어냈다. 국내외를 다니며 시장조사한 결과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독일의 한 와인 전문가는 "어떻게 이런 향을 냈냐"며 거꾸로 물어오기까지 했다. 출하 첫해인 지난해 9,900만원, 올해는 2억3,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통신·방문판매만으로도 내년 4억원의 매출을 자신하고 있다. 이 정도면 손익분기점에 도달한다.
이들이 정작 고무돼있는 것은 안정적인 포도 판로가 보장됐기 때문이다. 와인 제조용 포도는 포도송이가 성기고 못생긴 품종이다. 송이가 알차면 안쪽 포도는 익지 않아 포도주 맛을 내는데 부적합하다. 때문에 이곳 조합원들은 1등급은 시장에 내다 팔고 시장에서 외면받는 ‘못생긴 포도’는 이곳 공장에 납품할 수 있다. 판로와 가격이 보장되니 더 좋은 포도 생산에만 힘을 쏟을 수 있게 됐다.
내년에는 대부북동에 새로운 공장을 차리는 등 생산 규모를 10배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현재 3가지인 브랜드를 다변화하기 위해 해외에서 8가지 포도 품종을 들여와 비밀리에 시험재배중이다. 이 공장이 정상가동되면 현재 2만원인 1병(750㎖) 당 가격을 수입산과 맞먹는 1만2,000원대로 낮춰 거꾸로 해외에 수출할 구상도 세워놓았다.
김지원(40) 그린영농조합 대표는 "우리 목표는 조합 포도 수매를 넘어 국내 최고의 와인 생산업체로 성장하는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대부도 전체의 포도농가들이 막강한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개방 첫해인 올해 국내 시설포도 농가들은 재배면적을 오히려 140㏊ 늘려 ‘칠레 효과’가 미미했음을 증명했으나 향후 관세가 철폐될 경우 당도가 높은 칠레산 포도와의 정면대결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해답은 평범한데 있다. 달기만 한 아열대 기후의 포도와 달리 향이 좋고 신맛이 있어 쉽게 질리지 않는 우리 포도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기 화성시 송산포도단지는 내년 100여톤의 포도를 미국 등 6개국에 수출하기로 했을 정도로 경쟁력이 탁월하다.
화성포도수출협의회 남윤현 총무는 "질 좋은 포도는 수출로, 질이 떨어지는 포도는 가공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길을 노려야 한다"면서 "경쟁력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해야 하며, 또 구하면 된다는 것을 우리 농민들이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범구기자 gogu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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