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12월28일 영국 소설가 조지 기싱이 46세로 작고했다. 한 시절의 낭만적 열정과 정의감이 생애를 얼마나 고달프게 만들 수 있는지를 기싱의 삶은 보여준다. 웨이크필드의 약제사 아들로 태어난 기싱은 어려서부터 수재로 소문 났고, 장학금을 받아 오언스대학(지금의 맨체스터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지방 중산층 출신 고전학자 지망생의 생애는 그가 한 매춘부와 사귀면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를 진정 사랑했고, 여자 때문에 절도에 휘말려 들었고, 투옥되면서 학교에서도 쫓겨났다. 두 사람은 결혼했고, 그들 앞에 기다란 가난의 세월이 펼쳐졌다.그러나 기싱은 제 가난을 질료로 삼아 빅토리아조 말기 영국 하층계급을 핍진하게 그려내는 자연주의 작가가 되었다. ‘새벽의 노동? ‘밑바닥 세계' 같은 작품에서 묘사된 슬럼가 풍경을 그는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죽기 직전 출간한 반(半)자전소설 ‘헨리 라이크로프트의 사적(史的) 기록'에는 파란의 세월을 보낸 작가의 감개가 배어있다. 작가들의 재정적 궁핍과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그린 ‘뉴그럽스트리트'(지금은 밀턴스트리트로 이름이 바뀐 런던의 그럽스트리트는 본디 삼류 문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다)가 기싱의 가장 잘 알려진 소설이지만, 그는 이밖에도 스물두 편의 장편소설, 100여 편의 단편소설, 여행기, 문학평론, 에세이 그리고 여러 권의 책으로 묶일 만한 양의 편지를 썼다. 근면으로 일관된 생애라고 할 수 있었는데, 유복과는 거리가 있었던 이 삶의 에피소드들은 기싱의 작품 못지않게 여러 세대의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가난한 남부 이탈리아 여행기인 ‘이오니아 해변에서'의 등장인물들까지 포함해 기싱 소설의 인물들은 대체로 가난에 치여 살지만, 작가는 사회주의자가 되기엔 너무 비관주의자였다. 만년의 기싱은 젊은 시절 공부했던 고전 세계에 매료돼 관조의 나날을 보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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