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서 형광 망막 혈관 조영상에 대한 주사마취제의 비교.’내 가장 친한 친구의 수의학 석사 논문 제목이다. ‘망막’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로 봐서 개의 눈에 대한 논문임을 알 수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 집을 내 집처럼 들락거렸다. 그 때마다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건 ‘홈즈’라는 이름의 퍼그 종 강아지였다. 어찌나 살갑던지 친구네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친구 집에 개가 한 마리 더 있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절구’라는 덩치 큰 녀석이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에게 걷어차여 한 쪽 눈을 잃은 장애견이었다. 거리감각과 인간에 대한 친밀감을 잃어버린 절구는 2층 베란다에서만 지냈다. 그런 절구를 내 친구는 한결같이 돌봐주었다.
별로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내 친구. 대학에 진학하고, 시위 때문에 일을 치르고, 군대를 다녀오고, 수의사 자격시험에 떨어지고,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가 졸업 후 어엿한 수의사가 되기까지. 녀석의 꿈이 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너무 가까워서였을까, 관심 없었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졸업 논문이 개의 눈에 관한 것이라니. 내 친구는 10년 동안 논문을 써온 것인지도 모른다. 절구의 한쪽 눈을 잊지 않고서, 묵묵히 말이다.
얼굴이나 볼까 싶어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당직이란다. 하긴, 너 아니면 누가 연말에 당직을 서겠냐. 존경 담은 핀잔을 줬더니 쑥스러운 듯 말끝을 흐린다. 아쉬워하는 친구의 목소리 아래로 차분한 열정이 들려온다.
여기저기서 올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일로 떠들썩하다. 한 해의 끝이든 시작이든, 세상이 망하든 다시 열리든, 오늘은 오늘이다. 성실하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만이 오늘의 가치를 누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친구를 통해 다시 한 번 마음에 되새겼다.
황재헌 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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