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현대사 100여 년은 참으로 곡절이 많았다. 망국과 광복, 분단과 전쟁, 경제개발과 군사독재, 민주화운동 등 그야말로 피와 땀과 눈물의 역사를 통과했다. 이 모든 사건과 곡진한 사연들을 어린이들에게 오롯이 일러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짚는 것만도 벅찬데,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까지 담아서 말하려면 숨이 턱에 찰 노릇이다.김기정의 장편동화 ‘해를 삼킨 아이들’은 이 어려운 숙제를 훌륭하게 해치우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능청맞은 이야기 솜씨로 풀어낸 재미있는 작품이다. 구한말 외세의 침탈로 망해가던 나라의 서글픈 풍경으로 시작해서 붉은 악마의 열기로 뜨거웠던 2002년 한일 공동월드컵에 이르기까지, 10명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10편의 동화로 역사를 말한다. 철저히 민초의 관점에서, 아이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 어떤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저 옛이야기 들려주듯 구수하게 술술 말하고 있지만, 거기에 담긴 역사의식은 무겁고 진지해서 오래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각 단편의 주인공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간설화나 각 지역의 민요, 무당들이 부르는 줄거리가 있는 긴 노래 등에서 끄집어낸 캐릭터를 가공한 것이다. ‘하늘님의 손자, 단군 할아버지가 아사달과 아리와 흰범이를 낳고, 흰범이가 범눈썹이와 오목눈이와 칡범이를 낳고, 오목눈이는…’ 하고 길게 이어지는 족보를 한참 헤아린 끝에 등장하는 ‘애기장수 큰이’ 이야기는 구한말이 배경이다. 엄청나게 큰 산삼을 캔 애기장수 큰이가 산삼을 임금님께 갖다 드리러 떠난다. 그러나 노란머리 도깨비들과 섬나라 도깨비들이 판을 치고 쇠구렁이(전차가)가 돌아다니는 서울에서 그 등쌀에 기도 못 펴는 허약한 임금님을 보고 실망한다. 놀라고 분한 큰이는 그 도깨비들을 혼내서 화풀이를 하긴 하지만…
다음 이야기는 망한 나라의 공주로 태어나 부모를 잃고 몸을 숨긴 채 살아가는 ‘거지공주’ 이야기다. 거지공주의 슬픈 운명은 물론 망국의 한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10편의 동화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제주도 4·3 항쟁, 군사독재,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등을 거쳐 마지막 단편 ‘아우라지 까마중’의 2002 월드컵 이야기로 끝난다.
그 중 제주 4·3항쟁을 다룬 ‘오돌또기’는 처연하면서도 눈부시다. 4·3 통에 부모를 잃고 할망 하르방 손에 자란 소녀 오돌또기가 죽은 이들이 산다는 신비의 섬 이어도를 다녀온 뒤, 어찌어찌 찾아간 한 동굴에서 부모의 해골을 발견한다. 그 순간 아기 적부터 곱았던 손가락이 비로소 펴지며 그 손에 어멍 아벙의 손가락 뼈가 매운 재로 남는다는 줄거리는 4·3사건으로 가슴에 피멍이 든 제주 사람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감동적인 판타지다.
이 책의 단편들은 밝고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노래하듯 술술 흘러가는 문체로 익살까지 부려가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의 솜씨 덕분에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 삽화로 실린 김환영의 목판화도 투박하면서도 강렬한 선과 색채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