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술자리가 잦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언제나 심각한 경제상황에 대한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대개는 먹고 살기 어렵다는 새삼스러운 자각을 경쟁적으로 토로하기 십상이지만 더러는 경제상황에 대한 진지한 진단과 전망도 곁들여진다.탄탄한 중소기업을 일궈 올해 같이 어려운 때에도 20%나 매출을 늘렸다는 한 친구가 꺼낸 ‘디지털 망국론’은 귀를 솔깃하게 했다. 그는 휴대폰을 예로 들었다.
"한국이 휴대폰 생산과 이용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여러 기업이 세계시장의 강자로 떠올랐지만 속 빈 강정이야. 필터와 액정, 배터리 등 핵심 부품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거나 기술사용료를 주어야 하기 때문에 부가가치가 별로 없어. 그나마 매출 규모가 커서 거액의 이익을 내지만 주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외국인에게 나가는 배당금 등을 빼고 나면 그 회사 종업원들이 일부 혜택을 누리는 게 고작이지. 가난한 사람들의 호주머니에서까지 다달이 수만~수십만 원의 이용료를 꺼내 가는 데 비하면 하잘 것 없어.
애초에 소재·부품 산업을 키우고, 그를 바탕으로 디지털 산업으로 조금씩 전환해야 하는데 우글거리는 ‘디지털 전도사들’이 마구 뿌리는 ‘디지털 복음’에 사로잡혀 아날로그 산업을 내버려둔 채 급히 디지털로 달린 결과지.
자본가에게 디지털 산업처럼 매력적인 것이 또 있겠어. 내가 아는 한 기업은 300억원을 투자해 마련한 6,000평 규모의 공장에서 PDP파우더를 생산해 연 2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공장자동화로 종업원 21명이 3교대로 일하고 있을 뿐이야. 자본수익률이 높은 데다 종업원들의 벌이도 짭짤해서 노사문제도 없어. 하지만 고용 없는 이런 기업이 아무리 잘 돼 봐야 나라경제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
그의 ‘디지털 망국론’을 들으며 외환 위기 이후의 ‘벤처 광풍(狂風)’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싹튼 위기가 이제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정말 그럴까 싶어 몇몇 기업을 조사해 보았다.
전자부품ㆍ소재를 만드는 A기업의 지난해 매출액은 약 4조2,000억원, 영업이익과 당기순익은 각각 약 7,800억원, 5,000억원이었다. 약 2만6,000명의 종업원이 일하고 있다.
브라운관과 PDP패널 등을 생산하는 B기업은 지난해 약 4조7,8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영업이익은 약 4,900억원에 머물렀으나 부동산업이 주축인 영업외수익이 3,600억원을 넘어 당기순익은 거의 6,500억원에 달했다. 약 8,100명의 종업원이 있다.
휴대폰을 만드는 C기업은 올 상반기에 약 4,6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기간 중 영업이익은 263억원, 당기순익은 106억원이었다. 종업원은 1,100여명이다.
A기업은 아날로그 산업에 고집스럽게 매달린 결과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인 제품을 여럿 가지고 불황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2만6,000여명의 종업원이 평균 연 6,500만원의 급여를 받아 소비시장에 활력을 주고 있다. 디지털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B는 매출은 비슷하지만 영업수익이 A에 비해 많이 떨어지고 고용효과는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디지털 산업을 상징하는 C의 상대적 고용효과는 A의 5분의 1밖에 안 된다.
디지털 산업이 미래의 산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미래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디지털, 디지털을 외치며 발 밑을 살피지 않고 달려가서는 안 된다. 더욱이 디지털 산업이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고용효과의 한계를 생각하면 아날로그 산업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 당장의 불황에서 벗어나는 데도 그렇고, 길게 보아서도 아날로그 산업이 뒷받침하지 않는 디지털 산업은 나라를 절망으로 이끄는 망상의 길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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