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보내면서 뿌듯함으로 혹은 아쉬움으로 남을 기억들. 문화계에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꼭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것들. 꼭 기쁘고 즐거워서 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들이 외치는 ‘메멘토!(memento, 라틴어로 기억하라!), 이것을’■ 영화/ 세계 3대 영화제서 잇단 수상 쾌거
샴페인 터뜨릴 일이 줄을 이었다. 한국영화 점유율 58%(IM픽처스 자료), ‘태극기 휘날리며’(사진), ‘실미도’의 1,000만 관객 달성. 무엇보다도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칸, 베를린, 베니스영화제에서의 잇단 수상, 한류바람을 타고 해외 수출도 호조를 띠어 상반기에만 3,000만 달러 획득 등등. 그런데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하반기 뚜렷한 화제작도 없었고, 흥행작도 관객은 70만~80만명 수준을 맴돌았다. 튼튼하지 못한 영화산업구조가 한국영화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해 3, 4년 내에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우울한 분석도 있으니.
어쩌면 자업자득. 전성기를 맞았다지만 현장 스태프는 하루 평균 13.9시간 일하면서도 월평균 60만 원 남짓한 임금을 받고, 영화의 풀뿌리라는 저예산 독립영화들은 여전히 상영관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게다가 스크린쿼터제도 미국의 거센 입김 앞에 등불꼴이다.
■ 클레식/ 창원시향 ‘구레의…’ 초연 기념비적
장윤성이 지휘한 창원시향의 쇤베르크 ‘구레의 노래’ 한국 초연(3월 27일 통영시민문화회관, 4월 7일 서울 예술의전당)과 존 엘리어트 가디너와 몬테베르디 합창단, 바로크 솔로이스츠가 공연한 퍼셀의 ‘디도와 아이네아스’(12월 11일 서울 예술의전당)를 어찌 잊으랴.
‘구레의 노래’는 쇤베르크가 1911년 완성한 대작이다. 창원시향 공연에는 독창과 합창, 관현악을 합쳐 280여명이 참여했다. 가히 우주적 스케일의 음악일 뿐 아니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걸작이다. 이 엄청난 작품을 창원시향이 훌륭하게 초연하다니. 국내 클래식 공연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가디너 일행의 ‘디도와 아이네아스’는 또 어떤가. 우리나라에선 낯선 바로크 오페라를 그 시대 양식을 따른 원전연주로 선보였다는 점에서 일단 학구적인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올 한해 다른 무대에서 들은 모든 음악을 잊게 할 만큼 훌륭한 연주였다는 사실. 그날 객석에는 바로크음악과 원전연주를 잘 모르는 관객도 많았지만, 감동을 받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역시 좋은 연주는 누가 들어도 좋고 오래 가슴속에 기억된다.
■ 연극/ 불황 여파로 앙코르 공연 붐
새로운 것을 만들 돈도, 기운도 없었다. 그러니 쉽게 손님 끄는 앙코르 공연으로 무대를 채울 수 밖에.
그중에서도 특히 1980년대 이후의 히트작들을 한 무대에 불러모은 ‘연극열전’이 최고였다.
1월 ‘에쿠우스’(사진)를 시작으로 ‘관객모독’ ‘오구’ ‘피의 결혼’ 등 15개 작품을 1년간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무대에 올려 17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연출가 전훈이 뚝심으로 밀어부친 ‘체호프 4대 장막전’이 있었다는 것.
■ 문학/ 냉혹한 현실에 꺾인 젊은 계간지 '파라21'
문학전문 계간지 ‘파라21‘은 지난 겨울호 ‘편집위원의 글’에서 "아무래도 문학은 평화로운 자리에서 안식하며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을 극단으로 내몰아 스스로의 언어에 추방령을 내리는 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고 적었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옐리네크의 문학과 성취를 정돈하는 대목에 별 대수로울 것 없이 놓여있던 이 한 문장이 지금 새삼스러운 것은, 이 계간지가 그 겨울호로 종간됐기 때문이다. 그 문장이, 이제서야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비장한 복선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편집위원들은 종간의 운명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 해 봄호로 창간해 통권 8호를 낸 ‘파라21’은, 떠난 것에 대한 예우의 에누리 없이 듣고 본대로 말해서, 젊고 참신하고 당찼으며, 기획 좋고 읽을 거리 풍부했던 드문 문예지였다. ‘파라21’의 종간은, 어려운 가운데 꾸준히 예산을 대던 이수그룹의 지원 중단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계의 반응은 착잡하기만 하다. 내년 봄호부터 장편 연재를 시작하기로 언약하고 다른 계간지 원고 청탁을 사양했던 한 소설가는 그 커다란 허탈감에 자신의 ‘사소한’ 낭패를 입에 담기 민망해 했다. ‘편집위원의 글’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결국 그 추방의 자리가 이제까지의 문학의 생명줄을 이어온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 학술/한·중 고구려사 논쟁 외교갈등 비화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한·중 고구려사 전쟁은 뜨거웠다. 중국은 사회과학원이 중심이 되어 역사왜곡을 노골화했고, 이에 맞서 우리 학계와 시민단체는 고구려연구재단 출범 등을 통해 역사 지키기에 나섰다.
급기야 외교 갈등으로 비화했고, 두 나라 정부 당국자 합의에 따라 학술적으로 풀기 위해 21, 22일 베이징에서 한·중 대표 연구기관의 고구려 학술회의까지 열렸지만 시원스레 문제가 풀릴지는 미지수.
중국은 고구려에 이어 발해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대대적인 유적복원, 정비공사를 진행 중이며, 국내 학계의 예측대로라면 2년 안에 중국의 역사유적 발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인될 형편이다.
■ 미술/샤갈 걸작 120여점 전시 내실 기해
‘색채의 마술사-샤갈’전(7월 15일~10월 22일 서울시립미술관, 11월 13일~새해 1월 16일 부산시립미술관)은 서울에서만 50만 관객 동원(유료 관객 39만 5,000명)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1,000만명을 돌파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비견할 만한 미술계의 블록버스터. 역시 흥행은 어느 예술분야건 작품성이다. 러시아 시기 대표작 ‘도시 위에서’, 50년간 수장고에 처박혀 있었던 모스크바 유대인극장 패널화 연작 ‘무용’‘연극’‘음악’‘문학’ 등의 걸작을 120여 점이나 가져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 방송/ 드라마 전성기… 한류 열풍 견인
온통 드라마였다. 지상파 3사는 상대적으로 시청률 올리기가 수월한 드라마에 올인했고, 시청자들은 드라마만 편식했다. 제작비 50억원이 넘는 ‘불멸의 이순신’ ‘영웅시대’ ‘장길산’ 등 대형 사극이 등장했고, 발리 파리 등 해외로케 트렌디 드라마가 봇물을 이뤘다. 그래서 재미도 봤다. 한국 드라마는 아시아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됐다. ‘겨울연가’를 필두로 ‘대장금’ ‘인어아가씨’ ‘올인’ ‘파리의 연인’(사진)까지.
■ 종교/ 도심 외출한 간화선 ‘대중속으로’
간화선(看話禪)이 산중에서 도심으로 나왔다. 선방에서 수행에만 전념해온 선승들의 법회가 잇달았다. 석달간 조계사에서 계속된 전국 선원장 초청법회를 시작으로 서울 강남 봉은사의 육조단경 논강, 상도동 보문사의 참선대법회, 삼각산 도선사의 고승초청 대법회, 대구 동화사의 담선(談禪)대법회 등 간화선을 주제로 한 법회가 일년 내내 이어졌다.
그동안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승들의 법회는 특별한 경우에만 간혹 있었지만 올해처럼 자주 대중 앞에 나와 법문도 하고 문답도 한 것은 불교 역사상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선승들의 법회는 간화선 위기론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시작됐지만, 경기 불황에 따른 좌절로 사람들에게 더욱 호소력을 주었다. 조계사 법회는 수천 명씩 참가했고 다른 법회마다 사람들로 꽉 찼다. 오대산 월정사의 1개월 단기출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것도 간화선 열기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지난 일년 우리의 삶이 그만큼 허전하고 팍팍하고 고통스러웠단 말이 아닌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