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네이도 같다’고 한다면, 이 소설에 대한 적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 회오리 속에서는 연말의 우울한 혼까지 빨려든 듯 다만 혼몽했고, 거기서 벗어나서야 금방 지나친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표현 이외의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난 뒤의 첫 마디, ‘우와~!’ 는 감탄사라기보다는 신음이었다. 천명관씨의 장편 ‘고래’(문학동네 발행)는 그런 소설이다.‘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공의 이름은 춘희이다.’ 이 심상한 첫 문장으로 ‘그 옛날 평대의 골짜기를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p.22) 소설은 시작하지만, 눈덩이처럼 부풀어가는 이야기와 문장은 가히 ‘대하(大河) 구라’라 할만하다.
벽돌공 춘희는 기골이 장대한 벙어리로 금복의 딸이다. 금복은 동생을 낳다가 어머니가 숨진 뒤,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다 열 네 살에 생선장수를 따라 남쪽 바닷가로 도망쳐 나온, 이재(理財)의 천품을 타고 난 여장부다. 그들 모녀보다 앞서 산 국밥집 노파도 있다. 그는 워낙 박색이라 신혼 첫날 소박을 맞고 늙어가며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소설은 이들 여자들이, 대를 이어가며 풀어내는 ‘지난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매력은 작가의 현란한 ‘구라’에 있다. ‘미사일론에 대한 반박이 뒤따랐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노파가 어떻게 미사일을 아느냐는 거였다. 귀신이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다는 해명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라는 반박이 나왔으며, 뒤이어 어따 대고 선배 앞에서 그 따위 개소리를 하느냐는 성명이 발표되자…’(p.243) 한 문장 안에 쉼표 대여섯 개를 던져놓고 원고지 두 세 장을 예사로 이어가는 그의 ‘구라’는 지난 시절 변사의 어법으로, ‘컨베이어 위에 얹힌 귓속말’로, 약장수의 너스레로, 화투 패 뒤집으며 늘여놓는 퇴기의 넋두리로 시시각각 변주되며 전개된다.
세상을 떠돌며 이런저런 남자들과 곡절을 엮어가던 금복이 평대라는 동네에 들어 찻집을 여는데, 그 집은 국밥집 노파가 살았던, 살면서 모은 현금과 땅문서를 감춰둔, 절명하면서까지 끝내 그 사실을 함구했던 바로 그 집이다. 금복은 노파의 재산을 발견하고 타고난 수완으로 평대와 근동의 마을들이 기함을 할 정도의 사업을 벌여나간다.
금복 등 등장인물들의 삶은 대부분 비극적으로 끝난다. 그것이 노파의 복수의 완성인지, 인간의 거침없는 욕망에 대한 운명의 경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그저 믿고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 뿐이다.’(p.117)
죽음의 공포라는 금복의 유년 경험과 원초적 생명력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고래’의 이미지적 대비, ‘모든 죄악의 근원은 가난’이라는 그녀의 신념과 노파의 복수 등은 자칫 가볍게 읽힐 수 있는 소설에 무게감을 부여한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은 형식상 설화와 신화 전설 동화 영화 에피소드 등 이야기장르의 낯 익은 장면들을 기워놓은 퀼트 서사로 칭할 만하다. ‘구라’가 과하다 싶은 대목이 없지 않지만, 여인 3대의 파란만장한 삶을 아우르는 스케일과 토막들을 이어 붙인 솜씨에 가려질 흠이다.
천명관씨는 지난해 단편 ‘프랭크와 나’로 데뷔했고, 이 소설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탄 신인이지만, 몇몇 영화 시나리오를 썼고 연출에도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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