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매력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정치를 전공하는 정치학자로서 개인적으로 여행이 갖는 매력은 잠시나마 지겨운 한국정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2주간 남미를 여행하고 돌아와 그동안의 신문들을 들여다보자 즐거웠던 시간은 끝나버리고 엄연한 한국정치의 현실들이 다가들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불행하게도 여전히 끝없는 대립과 파행을 골자로 하고 있다. 물론 그 대립의 핵심에는 4대 개혁법안을 둘러싼 여야간의 이념대립이 자리잡고 있지만 현재의 파행을 야기한 직접적인 계기는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에 대한 한나라당의 간첩 시비이다. 안타까운 일이다.백번 양보를 해서 순수한 가정으로 한나라당의 문제제기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왜 이미 사면복권이 된 사안에 대해 새삼 문제를 제기해 이 같은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과거의 전력으로 이야기하자면, 한나라당이 존경해 마지않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다른 때도 아니고 해방정국의 첨예한 분단상황에서 남로당의 군부핵심 프락치였다. 즉 한나라당식 논법에 따르면 ‘북괴의 간첩’으로 암약했었거늘, 왜 이는 문제 삼지 않는지 기이하기만 하다. 누가 뭐라 해도, 국회의원보다는 일국의 대통령에게 더 엄격한 기준이 필요한 것 아닌가?
기독교 신자들은 엄청난 시련이 닥쳐도 하느님이 그 같은 시련을 주신 이유가 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바로 이 같은 발상과 비슷하게, 이번 파동은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고 어느 의미에서는 한국정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사건은 이제 낡은 색깔공세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냉전세력에게 절감케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번 파동과 같은 어이없는 사건이 터진 것은 낡은 색깔공세는 이제 끝내야 한다는 것을 냉전세력이 깨닫도록 해주기 위한 하늘의 깊은 뜻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냉전세력의 극렬한 대변인인 보수언론들의 반응이다. 조선일보조차도 이번 파동에 대한 자체 여론조사 결과에 기초해 "정쟁성 이념공세는 이젠 안 먹힌다"고 고백하고 나섰다. 즉, 이 여론조사에 따르면 50%이상의 국민이 이 의원 관련 시국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또 한나라당의 문제제기에 대해 적절했다고 답한 사람들(28.8%)의 배 이상(57.7%)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답했다.
특히 한나라당과 냉전세력의 최대 지지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50대 이상과 영남권에서조차 이 같은 비판적 의견이 우세한 것에 주목해 정쟁성 이념공세는 이제 먹히지 않는다고 인정하고 나선 것이다.
문제는 한나라당이다. 이 컬럼을 통해 이미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한나라당 최대의 적은 노무현 대통령도, 열린우리당도, 방송과 진보적인 인터넷 언론도 아니다. 바로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냉전세대는 점점 줄어들고 인구의 절대다수는 탈냉전적인 젊은 세대가 차지해 가고 있다. 지금과 같은 낡은 색깔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한나라당이 이 같은 ‘시간의 정치’에 필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어떤 질병이 생기기 시작하면 대부분 전조증상이 있기 마련이다. 무언가 이상이 있으니 대처하라는 신호이다. 이 같은 신호를 읽고 대처하는 사람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쓰러지게 마련이다. 이철우 의원 파동은 낡은 냉전주의에 대한 마지막 전조증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뒤늦었지만 이 같은 신호를 한나라당이 읽지 못한다면 결국 시간의 정치가 한나라당을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버릴 것이다.
시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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