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8일 낮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 부근 야산. 마스크에 검은 모자를 눌러쓴 30대 중반의 한 사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파헤칠 때마다 토막난 부녀자들의 시신과 유골이 마구 뒤엉킨 채 발견됐다. 십수년 산전수전 다 겪은 형사들조차 이날의 참상에 진저리를 쳤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34)은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지난해 9월부터 시작된 엽기적 살인행각은 21명의 목숨을 앗아간 뒤에야 종지부를 찍었다. 출장 마사지 일을 하던 윤락여성들부터 결혼을 이틀 앞둔 예비신부까지 모두 아무런 연고도 원한도 없는 이들이었다.
끔찍한 범행이었던 만큼 희생자 유족의 상처도 깊었다. 현장검증을 위해 그가 나타나는 곳마다 울부짖음이 그치지 않았고, 4월 인천 월미도에서 유영철에게 희생된 한 노점상의 동생 안모(44)씨는 그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던 중 지난달 20일 자살했다. 분을 참지 못해 호송중인 유영철에게 달려들던 한 유족을 경찰관이 발길질로 떼어놓던 장면이 보도되면서 경찰의 무지한 행동이 또 한번 국민의 분노를 샀다.
범행의 잔혹성 만큼이나 국민적 분노를 불렀던 것은 유영철이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보여준 태연함과 뻔뻔스러움이었다. 검거 당시 "100명을 죽이려 했는데 시작 단계에서 잡혔다"고 말문을 열더니, "내 모습이 방송에 잘 나왔냐" "검찰에게는 조사를 받고 싶지 않다"는 등 온갖 기행을 일삼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1심 재판 마지막 날에는 "가난한 사람들도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오면 나 같은 놈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의 죄를 ‘잘못된 사회의 부산물’인 양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사건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법원이 당초 그의 소행으로 알려졌던 이문동 살인사건 등 일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유족들도 "유씨의 범죄를 막지 못한 국가에 책임을 묻겠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유영철의 이름은 앞으로 한동안 화제의 중심을 벗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전성철기자 foryou@hk.co.kr
■ 사건 클릭/ 이혼 아픔속 전처와 동종 직업여성 노려
유영철의 살인행각은 1991년 결혼해 아들까지 두었으나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것이 계기가 됐다. 노동일을 하는 부모 사이에서 3남1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중1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고2 때부터 무려 11년을 감방에서 보낸 그에게 결혼은 처음 맛본 행복이었기에 이혼당한 아픔도 컸다.
지난해 9월 출소 후 범행의 표적으로 삼은 것은 강남의 부유층. 그러나 자신이 살해한 모 대학 명예교수 부부의 유족이 거액의 유산을 학교에 기부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을 거두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을 버린 부인에 대한 증오는 거두지 못했다. 이후 희생당한 피해자의 대부분이 전처와 같은 직업의 출장안마사가 대부분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한 살인마였지만 섬세하고 감성적인 성격이 일면이 알려지면서 국민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서울 노고산동 그의 오피스텔에서 발견된 여자 누드스케치는 수준급이었으며, 한 잡지사에 공모한 글이 당선돼 상금을 받은 사실도 밝혀졌다. 서울시교육청이 공개한 그의 초등학교 6학년 생활기록부는 당시의 그를 ‘상당히 어른스럽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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